클렘슨 대학(Clemson University)의 Bruce Yandle이라는 경제학자가 각종 규제의 탄생 배경과 작동
원리(?)를 설명한 이론 중에 불법주류상/주류밀매업자와 신앙인 이론(Bootleggers and Baptists Theory)이란 것이 있다.
이 이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Bruce Yandle이 이런 현상의 실질적 예로 든 것 중 하나가 영국에서 18세기 미성년 노동법 규제 움직임이 처음 일었을 때,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섬유산업이 미성년 아동의 노동력 착취의 온상이었다는 통념과 반대로, 실제로 다수는 섬유산업의 사용자들이었다는 거다. 그 이유는 이미 상당 부분에서 생산과정을 자동화한 공장 소유주들 입장에서는 미성년 아동들의 노동 규제를 통해 경쟁업체들을 몰아낼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런 이들에게 '어린 아이들의 인권 보호'라는 도덕적 구호만큼 효과적인 로비 수단은 드물었던 셈.
자, 그럼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규제의 강화든 완화든, 어떤 정책적 제안의 이면에는 '이론적'인 이상향에 대한 밑그림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이들은 순수하게 자유주의 경제학 이론에 따라 시장의 크기가 확대될수록 대다수의 소비자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갈 거라 주장하며 한미 FTA를 찬성할 수 있다. 반대로 어떤이들은 자본과 노동의 힘의 불균형을 바로잡는다는 관점에서 노동자 보호에 대한 수단으로써 노조의 결성을 찬성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떤 정책이든 그 정책으로 인해 조금 더 이익을 보는 집단이 발생할 수 있고, 그 집단들은 본래 주장의 타당성을 전면에 내세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특정 정책을 유도해낼 수 있다는 거다. FTA 찬성이 실제로는 국내의 소수 대기업이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소위 귀족노조라고 하는 특정 집단이 소속조합원들의 이익은 철저하게 보호하면서, 실제로 비노조 노동자들의 권익에는 무관심한 게 이런 경우다.
중요한 건, 자신이 지지하는 정책 혹은 반대하는 정책을 지지/반대하는 다른 모든 개인들이 같은 동기나 이유로 그런 선택을 내리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신과 동일한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이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는 실제로 자신의 그것과 정반대일 수 있고, 의외로 자신과 반대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의 목표가 자신의 것과 일치할 수도 있다. 표면적으로 나와 원하는 것이 같다고, 진심으로 나와 같은 걸 원하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유연한 사고를 한다는 건, 특정 개인이 도출한 결론에만 관심을 갖고 그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유의 과정에도 관심을 갖는 게 아닌가 싶다. 그게 가능하다면, 표면적으로는 믿는 게 달라보이는 사람들끼리도 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의 신앙인들이 '술은 사회적으로 유해하므로 최소한 주일에만이라도 금해야 한다'고 정부에 제안한다. 이런 이들의 주장이 일리가 있고 그 의도도 순수하다고 판단한 정부가 일요금주령을 발동한다. (금주령은 그 의도가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특정 개인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제삼자--정부의 힘을 빌린 교인들--가 대신 정해주는 것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에 대한 침해일뿐만 아니라. '건전한 사회'에 대한 특정한 시각을 선호한다는 원론적인 논의는 이 자리에서는 피하기로 하자.) 이런 식으로 규제가 발생할 때 뭐가문제일까?
금주령이 발동될 경우 즉각적으로 일요일에 술에 대한 공급이 사라진다. 그렇지만 이런 형태의 강제적인 공급의 제거는 수요의 감소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술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존재한다. 술에 대한 수요가 존재하고, 공급이 급감한 경우 그 수요와 공급의 간극을 매우기 위해 불법주류상이 등장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이지만 이 불법주류상은 (음지에서) 시장을 독점할 기회를 갖게 되고 이를 통해 큰 이득을 취하게 된다.
이 예에서 나타나는 현상의 핵심은 '건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한 움직임이 정부 규제를 통해 특정 이익 집단을 만들어내고, 이 이익 집단에게 이 규제를 유지 또는 강화할 빌미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불법주류상들이 금주령을 지지하는 원인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기 때문이지만, 그런 자신들의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금주령 유지나 강화를 위한 로비를 할 때는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도덕적 당위성' 따위를 내걸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 두 집단, 신앙인들과 불법주류상인들 사이에 의도치 않았던 연대가 형성된다.
Bruce Yandle이 이런 현상의 실질적 예로 든 것 중 하나가 영국에서 18세기 미성년 노동법 규제 움직임이 처음 일었을 때,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섬유산업이 미성년 아동의 노동력 착취의 온상이었다는 통념과 반대로, 실제로 다수는 섬유산업의 사용자들이었다는 거다. 그 이유는 이미 상당 부분에서 생산과정을 자동화한 공장 소유주들 입장에서는 미성년 아동들의 노동 규제를 통해 경쟁업체들을 몰아낼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런 이들에게 '어린 아이들의 인권 보호'라는 도덕적 구호만큼 효과적인 로비 수단은 드물었던 셈.
자, 그럼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규제의 강화든 완화든, 어떤 정책적 제안의 이면에는 '이론적'인 이상향에 대한 밑그림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이들은 순수하게 자유주의 경제학 이론에 따라 시장의 크기가 확대될수록 대다수의 소비자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갈 거라 주장하며 한미 FTA를 찬성할 수 있다. 반대로 어떤이들은 자본과 노동의 힘의 불균형을 바로잡는다는 관점에서 노동자 보호에 대한 수단으로써 노조의 결성을 찬성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떤 정책이든 그 정책으로 인해 조금 더 이익을 보는 집단이 발생할 수 있고, 그 집단들은 본래 주장의 타당성을 전면에 내세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특정 정책을 유도해낼 수 있다는 거다. FTA 찬성이 실제로는 국내의 소수 대기업이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소위 귀족노조라고 하는 특정 집단이 소속조합원들의 이익은 철저하게 보호하면서, 실제로 비노조 노동자들의 권익에는 무관심한 게 이런 경우다.
중요한 건, 자신이 지지하는 정책 혹은 반대하는 정책을 지지/반대하는 다른 모든 개인들이 같은 동기나 이유로 그런 선택을 내리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신과 동일한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이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는 실제로 자신의 그것과 정반대일 수 있고, 의외로 자신과 반대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의 목표가 자신의 것과 일치할 수도 있다. 표면적으로 나와 원하는 것이 같다고, 진심으로 나와 같은 걸 원하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유연한 사고를 한다는 건, 특정 개인이 도출한 결론에만 관심을 갖고 그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유의 과정에도 관심을 갖는 게 아닌가 싶다. 그게 가능하다면, 표면적으로는 믿는 게 달라보이는 사람들끼리도 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 주류밀매업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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