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읽기
자주 놀러가는 이웃집의 J모 군 -- 이 양반도 꽤나 잡소리 하기를 좋아하는 드문 친구인데, 최근 포스트 '선험적 진리의 존재' 편에서는 심지어 칸트-러셀의 수리철학사 따위를 떠들고 있다. 다음에는 비트겐슈타인 쪽으로 빠질 예정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본인은 1) 바로 이 지점에서 갈라지고 2) 최근 언급된 펜로즈 경으로 이어지는 괴델 쪽의 길을 따라가 볼까 싶다.
§ 불쾌한 러셀 씨
J군이 좀 애매하게 썼는데, 어쨌든 러셀 씨는 수학에 대한 칸트 씨의 견해가 그닥 상쾌하지 않으셨다. "수학의 설득력은 굳이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구!" 마침 한 학회에서 --'난해하고 쓸모없다'는 악담을 듣던-- 프레게의 기호체계를 멋지게 휘두르시는 페아노 씨의 묘기에 꽤나 감동을 먹었다. 직관과는 무관한, 간결하고 기계적인 순수 논리의 연쇄. 러셀은 이 체계를 이용해 수학을 논리학과 일치시키는 작업에 착수했고, 마침내 화이트헤드와 함께 불후의 명저 <수학 원리> 3부작을 집필하기에 이르렀다. '수학은 소수의 선험적 진리 위에 쌓아올린 논리적 연쇄의 탑이며, 따라서 분석적이다.'
@ 그러나 <수학 원리>의 기반인 칸토르의 집합론에서, 소위 '집합'이란 놈이 뭔가 근본적인, 선험적 혹은 논리적 필연이라는 근거를 찾아내지는 못했더랬다.§ 낙원의 힐베르트
철학적 컨셉이야 어쨌든, 대상이 실재하든 말든, 수학의 정수는 엄밀한 전개에 있다고 생각한 속 편한 양반도 있었다. 다비드 힐베르트 씨는 수학의 철학적 정체 따위엔 별 관심을 안 가졌지만, 이걸로 오바질하는 사악한 무리들 -- 브로베르를 위시한 소위 직관주의자들의 행패(?)는 도저히 참아줄 수 없다는 견해였다. "아놔 이 잡것들-_- 중요한 건 명확한 논리 뿐이라구! (버럭)"
그는 러셀의 논리를 받아들여 공리계의 개념을 확립하고 그로부터 엄정한 형식논리에 의해 확장되는 무모순 체계로서의 수학을 주장했다. 공리는 다만 약속일 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든지 -- 진리든 아니든 어느 쪽이든 고민할 필요따위 없다는 거였다. 이 접근은 그 정교함에 힘입어 당대 수학의 최전방을 성공적으로 탐험하고 확장했으며, 현대 공리주의 수학으로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그렇다지만.눈부시게 발전하던 수학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성과가 발견한 일단의 패러독스에 둘러싸여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국 잘나가는 힐베르트 선생께서는 급기야 1920년, 수학의 완전성을 지탱할 견고한 논리적 기반을 구축한다는 초대형 프로젝트의 발동을 선언하셨다. 이른바 형식주의, '힐베르트 프로그램'의 시작이다. 무림 최고수들이 힘을 모으자 비록 제한적이긴 해도 긍정적인 결과들이 하나둘 쌓여갔으며, 이에 한껏 고무된 힐베르트는 1928년 "젊은 수학 세대를 위한 과제"란 간지나는 타이틀로 3 개의 야심찬 질문을 제시했다: "1) 수학은 완전한가? 2) 수학은 모순이 없는가? 3) 수학은 결정가능한가?" -- 언젠가는 이들 모두 Yes라 대답할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믿었는데.
§ 파멸의 천사 괴델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최고의 논리학자', '천 년에 한 번 나올 천재' 따위 찬사를 듣는 이 양반에게도 학창시절이란 게 있었다. 원래 물리학도였는데 정수론 강의하던 힐베르트의 제자 푸르트뱅글러 씨에게 낚여 수학과로 옮겼다고. 일찍부터 힐베르트를 조낸 존경했으며, 1929년 박사 논문인 <1차 술어논리의 완전성 정리>는 수학의 논리 전개가 완전함을 보여 힐베르트 프로그램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벗뜨.
잔몹 대충 잡았으니 보스 공략이 남았다. '쌓은 방식은 완벽하다. 그렇다면 그 기반은 튼튼한 것일까?' 분위기 제대로 타신 괴델 선생은 여세를 몰아, 수학의 가장 심원한 기초이며 그 완전성의 발원지인 산술체계의 진리를 향해 거침없이 내달렸다. 마침내 운명의 1931년, 인류 지성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 중의 하나로 칭송받는 그의 업적이 완성된다.불완전성 제 1 정리 - 산술을 포함하는 어떤 논리체계도 무모순인 동시에 완전할 수 없다.
불완전성 제 2 정리 - 산술을 포함하는 어떤 논리체계도 스스로 무모순임을 증명할 수 없다.
<장대하고 화려한 저택을 구경하고 있는데, 아래로 내려가다 보니 1층이 아예 없고 집 전체가 공중에 붕 떠 있는 광경을 목도하여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랄까. 수학은 결국 완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았으며, 힐베르트 프로그램의 이상은 성취될 수 없음이 선포되었다.
§ epilogue
괴델은 우울했다. 존경하는 대스승님 필생의 목표를 자기 손으로 끝장낸 거야, 뭐 그럴 수도 있지 악의로 한 것도 아니고 이 바닥이 원래 그런 거니까.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괴롭혔던 것은 그의 이론에 대한 다른 이들의 오해였다.
괴델 자신은 수학적 진리가 실재한다는 플라톤주의자였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어쩐지 보통 거꾸로 이용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가 보인 것은 '직관이 필요없는 기계적 계산 따위로는 결코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쪽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 이성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불완전성 정리'는 비슷한 '불확정성 원리'와 함께 포스트모던 철학계에서 대표적으로 남용되었다고 할 수 있는 이론이며, 심지어 괴델의 경우는 완전 반대로 인용되기까지 하니 확실히 짜증이 날 만도 했다.비트겐슈타인과는 거의 원수였다는. "저 양반은 내 이론을 아예 모르는 거지! -_-"
@ J군의 다음 편, 기대하겠삼 ㅎㅎ
@ 덧글의 최군 지적을 반영했음 ㄸㅆㄸㅆ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런 게 재미있을 수 있다니... *_*
무지 재밌지 않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