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발 금융 위기로 세상이 시끄럽던 시절에 이에 대해 글을 좀 쓰다가 잠수를 탔었는데, 약간 방향을 바꿔 이 이야기를 다시 해볼까 한다.

사람들은 "세상 참 좋아졌다"는 말을 종종 한다. 세상이 정말 살기 좋아졌느냐는 사람들의 가치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대답하기 쉽지 않지만, 세상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와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보릿고개라는 말로 상징되던, 굶는 게 일이라 말 그대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하던 시절이 불과 50-60년전 일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을 게 없어 고민하지는 않는다. 물론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서 요샌 더 맛있는 걸 못 먹는다는 사실에 대해 괴로워하고, 그래서 세상이 정말 살기 좋아졌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50년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건 사실이다.

재미있는 건 사람들이 이 풍요에 대해 상당히 이중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거다. 세상이 물질적으로 갈수록 풍요로와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재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법이 별로 없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수많은 극빈국이 수십년 동안 상당한 해외 원조를 받아왔고, 엄청난 자연자원을 갖고 있음에도, 수십년전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품었던 장미빛 예상과는 달리 아직까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점점 풍요로와지는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당연한 일만은 아니다.

최근의 경제학은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주어진 틀 안에서 인센티브가 어떻게 형성되고, 그 인센티브에 따른 개개인의 대응, 그리고 그런 개개인의 행동이 통합적으로는 어떤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는지를 연구하는 포괄적인 개념의 학문으로 발전했지만 좁은 의미에서 경제학은 재화, 용역, 화폐의 분배를 다루던 학문이다. 그런 경제학을 이용해 '세상의 풍요'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고, 아담 스미스는 아주 노골적으로 자신의 책제목으로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국부론>이라고 짓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번 경기 침체에 대해, 이번 금융위기나 대공황 같은 구체적인 에피소드보다 보다 일반적이고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경제 발전과 침체의 싸이클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이야기를 조금 볼 생각이다. 물론 전공이 경제학도 아니고, 대학 다닐 때 경제학개론도 한번 들어본 적이 없는지라 완전 아마추어의 제멋대로 경제학에 기반한 설명이니, 나보다 더 모르는 분들은 내 이야기가 다 맞다고 오해하시는 일이 없길 바라고, 나보다 더 잘아는 분들께는 가차없는 태클 부탁드립니다.

자, 오늘은 우선 간단하게 6명의 경제 주체로 구성된 농경사회를 생각해보자. 통화정책과 경제 발전 정도에 따라 이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통화나 재화의 량은 시시각각 변화겠지만 어떤 순간에 이 사회가 가진 부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매달 갑은 쌀 60kg, 을은 배추 6포기, 병과 정은 계란을 60개씩, 무는 비료를 4포대, 기는 사료를 4포대씩 생산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갑과 을은 각각 10전씩, 나머지 4명은 각각 8전씩을 갖고 있다. 쌀 10kg, 배추 1포기, 계란 10개, 비료나 사료 한포대의 가격이 각각 2전이고, 각 개인은 한달에 쌀 10kg, 배추 1포기, 계란 20개로 굶어죽진 않을 정도로 먹고 살 수 있다. 자, 각 개인의 매달 가계부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그 누구도 다른 어느 거에 돈을 더 쓸 게 없을 정도로 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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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날 병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닭장에 지붕을 씌워주면 닭이 알을 두배로 많이 나을 거라는 이야기를 한다. 아침에 일어난 병은 그길로 닭장에 지붕을 씌워줬는데, 정말 똑같이 사료 한포대를 먹였는데 계란을 한달에 120개씩 낳기 시작하는 거다. 자, 병은 그동안 사료값으로 4전을 투자해서 매달 계란 60개를 생산해왔다. 그리고 그중 시장에서 내다판 계란 40개의 가치는 8전어치였다. 이제 계란 120개를 생산하게 됐으니 병이 생산량이 2배로 증가한 건 맞는데, 그 생산량의 화폐가치가 2배로 증가했느냐면 꼭 그렇지는 않다? 응? 왜? 계란 10개가 2전이니까 이제 12전이 아니라 24전어치의 계란을 생산한 거잖아.

문제는 시장에서의 가격은 수요-공급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 갑과 을이 계란을 아무리 좋아해도, 계란에 쓸 수 있는 돈은 각각 4전밖에 없다면, 단순히 병이 계란을 많이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더 많이 살 이유는 없다. 그동안은 계란의 수요와 공급이 평형 상태였는데, 갑자기 계란의 공급 과잉이 나타난다. 이때, 병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가격을 낮춤으로써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거다! 무슨 이야기냐면 그동안 60개의 계란 중 자기가 먹을 거 20개를 빼고 나머지 40개를 8전에 팔았는데, 이제부터 120개중 100개를 16전에 팔기로 한 거다. 병의 계란이 더 싸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와 기도 병에게서 계란을 산다. 그러면 다음달 이들의 가계부는 이렇게 되리라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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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만 보면 병의 '기술혁신'의 결과 계란의 가격이 내려갔고, 갑, 을, 무, 기는 그로부터 혜택을 봤지만, 정은 엄청난 피해를 봤다. 단순히 피해를 본 게 아니라,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정은 병과의 경쟁에서 패한 댓가를 치루는 것뿐이고, 이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거의) 없다. 요지는 기술혁신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같은 값으로 더많은 계란을, 극소수의 사람(이 경우에는 한사람)에게는 더 많은 돈을 벌게 해줌으로써 풍요를 안겨줬다면, 또한 극소수의 사람에게는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극심한 피해를 줬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끝이 여기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경제성장은 non-zero sum game이기 때문에 정을 희생시킴으로써만 꼭 다른 사람이 풍요를 누리는 건 아니다. 그 이유 중 한가지는 병에게 그동안의 기준으로 봤을 때 '필요 이상의 돈'이 생겼다는 거고, 돈 자체는 아무리 많아도 그 돈을 통해 교환 가능한 재화나 용역이 없다면 그 가치가 없다. 따라서 병은 매달 자신이 쓰던 8전 이외의 잉여 자금 8전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게 되고, 정으로써는 자신이 손해를 본 그 8전이 다시 기회가 되는 거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병에게 제안을 한다. 자신이 일주일에 한번씩 안마를 해줄 테니 매번 2전씩 내라는 거다. 이는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산업의 등장인데, 이런 새로운 상품이나 서비스는 대개 극소수의 부유층만을 위한 luxury good의 형태로 등장한다. 그럴 경우 다음달 각 개인의 가계부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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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로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그저 실제 세상은 이보다 훨씬 복잡다단하다는 뜻이 아니라, 기의 경우 다음달부터는 사료 판매값이 줄어들 수밖에 없으므로 이에 대한 대비를 하려 할 것이고, 정도 갖고 있던 계란 60개중 자신이 먹을 것 20개 외에는 최대한 많이 떨이로 팔기 위해 가격을 더 낮춤으로써, 병이 벌어들이는 돈이 조금 줄 것이고, 병은 자신이 더 벌어들인 돈으로 쌀이나 배추 등을 더 사려고 해서 이에 대한 수요 증가로 인한 가격 인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 경우 이익을 보는 사람과 손해를 보는 사람이 더욱 다양하게 생겨난다.

평형 상태에서 새로운 기술혁신으로 인해 평형이 깨질 경우 새로운 평형을 찾아가는 경로는 수없이 많다. 그렇지만 그 평형을 찾아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보통'은 기술혁신을 통한 비용절감은 가격 하락을 유발하며, 이 경우 누군가는 잉여자금을 갖게 된다는 거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자신이 갖고 있는 잉여자금을 소비하거나 투자하기 위한 대상을 물색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상품이나 서비스가 탄생한다.

그렇게 탄생한 상품은 대부분 초기에는 극소수의 부유층만이 누릴 수 있는 luxury good으로 출발하지만, 이것들 역시 계속되는 기술혁신을 통한 비용절감 효과가 나타나면서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사용하는 제품이 된다. 자동차, 컴퓨터, TV, 핸드폰 등의 변천사(?)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조금 빠를 거다. 처음에는 극도로 비싼 상류 사회의 전유물들이었지만, 생산과정의 자동화 등을 통해 생산비용을 절감하면서 오늘날 거의 누구나 사용하는 제품들이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생산로봇의 등장으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도 있었고, 경쟁사에 밀려 회사가 망하면서 실직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 경우에 이 노동자들을 사회가 어떻게 구제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 오해를 없애기 위해 한번 다시 강조하자면, '경제성장은 non-zero sum game이라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다거나 잠깐 피해를 보더라도 종국엔 그 풍요를 다같이 누리게끔 돼 있다'는 뜻으로 쓴 글이 아니다. 단순히 non-zero sum game을 통해 부가 창출되고 삶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와지는 과정을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 거고, 실제 세상에서는 앞선 예에서의 정처럼 잽싸게 자신의 손해를 매우지 못한 채 극심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을 시장의 원리라는 이름으로 방치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노동시장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면 다시 짚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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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는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이 있어서 과학고를 나오고 과기대도 나온, '과학자의 커뮤니티' 속에 파묻혀 있을줄만 알았던 내 주변에도 이제 과학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얼마 안 남았다. 그런 상황이 실망스럽다거나, 나만 남겨두고 떠나간 당신들이 원망스럽고 밉다는 정신나간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현실주의자가 이상주의자에게 냉소를 보내고, 이상주의자가 현실주의자를 비난하는 일이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지만, 쉽다고 손바닥만 뒤집고 앉아 있어봐라, 뭐가 남나. 다들 어린 마음에 속은 걸 어쩌겠는가. 나도 가끔은, 이 우중충한 지하 실험실에 내 청춘을 다 바치다가 어느날 정신을 차리고 고개 들어 세상을 둘러보니 남은 건 처자식에 빚더미일 암울한 미래에 대한 회의가 안 드는 거 아닌데...

그래도 내가 아직도 과학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은, 첫번째로는 나는 아직도 과학이 좋다. 과학이 지닌 논리의 정갈함, 1+1이 2인데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좋다. 목소리 큰놈이 하자는대로 하는 게 아니란 그 사실... 요새는 1+1이 2가 아닐 때도 있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1+1이 2가 아니라면, 그때에도 역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모두가 납득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 생각해보란 말이다. 과학하는 사람들 중에야 여느 바닥이나 마찬가지로 거짓말쟁이들이 널렸지만, 과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둘째 이유는, 오히려 남들이 다 떠나가니까 떠나기 싫어진다. 왠지 남들 하는 거 하기 싫고, 남들 안 하는 거 하고 싶어하는 어설픈 반항아라 어쩔 수 없다. (사춘기 소년도 아닌 것이... -_-,,) 마지막으로는, 대학원 와서 5년이 넘도록 논문 딸랑 두편 내놓은 별 볼일 없는 대학원생이지만, 나만이 이 바닥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이 꼭 있을 거라는 자존심, 그거 아직 버릴 수 없다.

사실 과학, 특히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축소되고, 과학자들에 대한 대접이 소홀해지는 건 꼭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국가나 기업 경영자들의 경영원리에 좌지우지되는 까닭이겠지만, 그 이면에 숨은 이유가 있다고 보는데, 바로 인간 진화의 속도가 정보와 지식의 생산 속도에 따라 잡혔기 때문이다. 과학이란 게 사이비 종교 교리가 아니다보니 무에서 유가 창출이 안 된다. 결국 '새로운 발견'하나를 위해 지금까지의 발견을 습득해야하는데, 사람 머리가 아주 빠른 속도로 비상해지는 일이 없다보니, 시간이 갈수록 학습에 투자해야하는 시간은 늘어나는 거다. 그렇다고 수명이 갑자기 늘어나는 일도 없기 때문에 '새롭고 놀라운 발견'의 속도가 계속해서 더뎌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진짜 솥빠지게 공부하는데도, 과학자들이 하는 일 없이 놀고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 와버리고 말았다. 한사람의 과학도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과학자들 대접이 갈수록 박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과학자를 푸대접하는 상황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이공계의 위기'가 '국가의 위기'가 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잣대를 적용했을 때 다다를 수 있는 하나의 결론일 뿐이기 때문이다. 밥을 굶어 생존이 위협될 정도의 빈곤에 시달릴 때에는 삶의 질을 가늠할 척도는 먹고 사느냐 굶어 죽느냐로 획일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밥을 굶지 않을 정도의 경제적 안정성이 확보된 이후에는ㅡ현실적으로는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경제성장을 통한 물질문명의 확대라는 획일적인 잣대가 압도적인 주류를 이루고 있다마는 원칙적으로는ㅡ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잣대를 가질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보다 자동차를 타는 것이, 촛불을 켜고 사는 것보다 형광등을 켜고 사는 것이 더 편리한 삶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게 반드시 더 나은 삶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문명이 제공하는 모든 혜택을 누리고 사는 내 삶이, 산속에서 수양하며 깨달음을 향해가는 이름 모를 그 누군가의 삶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의 기준은 마음먹기에 달린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니까, 과학자들 대접을 잘해줘야 된다는 이야기는 사실 다 호랑이가 풀 뜯어먹는 소리다. 극단적으로 말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호버크래프트가 자동차를 대체한들 그게 풍욘가? 뭐, 타이어 마모에서 나오는 분진 감소로 환경이 깨끗해질라나? 그건 확실히 좋은 일이긴 하겠군. --a 아무튼 과학자들 푸대접받는 게 못마땅하다는 건, 거리의 청소부가 푸대접받는 게 못마땅하다고 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다. (청소부를 예를 들어 청소부들한테는 조금 미안하군.) 왜냐하면 '과학의 중요성'이란 건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정의가 달라지는 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이공계 위기는 산업혁명 이후 사회구조의 위기이고, 자본주의의 위기이며 물질문명의 위기이지, 이공계의 위기가 아니며, 국가의 위기나 인간 삶의 위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게 단 몇명일뿐일지라도, 사람들이 과학이 재미있어서 과학을 하는 한, 이공계 위기에 이공계 위기는 없다.

그런데 진짜 문제가 뭐냐면, 국가와 기업 경영자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거다. 과학에 투자할 마음이 없다면 그거 탓할 마음은 없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과학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사람 사는 세계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일부다. 그걸 인정 안 해주면서, 과학이 중요한 거니까 과학자들 대접해달란 이야기, 낯짝 뜨겁게 어떻게 하냐? 그런데 경영자란 놈들이, 과학이 중요하네, 이공계생들의 처우 개선을 해야하네 따위의 말을 떠들면서 어설프게 사람들 현혹해서 열심히 쓰다 버리는 거, 이게 문제다. 곧 노벨상도 나올 거라는 개구리가 뱀 잡아먹는 소리로 바람 열심히 잡다가, 우리가 선진국에 몇십년 뒤졌다며 빨랑 쫓아가야된다고 쥐잡듯이 다그치는 정신 나간 놈들, 이게 문제다. 실험 장비 살 돈이라곤 땡전 한푼 안 주면서, 과학자들보고 왜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냐고 다그치기만 하면, 팥으로 메주가 쒀지냐?

우린 남는 게 빚더미 뿐이더라도 별로 바라는 것 없이, 왜 1+1이 2인지 신기해하면서 우리끼리 재밌게 잘 살 수 있으니까, 우리한테 해주는 것도 없이 바라지 말라는 말, 과학을 과학하는 사람들에게 넘겨달란 말, 그게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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