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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20 5. 우리가 언젠가 죽는 다는 건 맞는데 (1)
  2. 2010/06/06 3. 시장과 가격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 존 메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그동안 화폐주의 시카고 학파(밀튼 프리드먼), 오스트리아 학파(루드힉 폰 미제스), 케인즈주의자(존 메너드 케인즈), 고전주의 경제학파(애덤 스미스)의 발언들을 하나씩 살펴 본 관계로, 이번주에는 오나전 반대편의 공산주의자 칼 맑스(Karl Marx)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까 했는데, 최근 유럽의 재정 정책과 관련해서 시장주의자(시카고+오스트리아 학파)와 케인즈 학파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관계로, 이를 반영해서 케인즈 이야길 다시 한번 하고 다음주에 맑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마 경제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발언 중 하나인 동시에 누가 인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도 다양하게 변화하는 한 마디가 바로 케인즈의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즉, "장기적으로 봤을 땐, 우린 다 죽고 없는 걸..."이라는 한마디일 거다. 그럼 우선 이 발언이 나온 맥락이 무언지 살펴보자.

사실 이 말을 케인즈가 언제 처음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은데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24년이라고 돼 있는데, 대공황을 겪기 전인 이 당시엔 케인즈도 케인즈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발언의 맥락이 맞지 않다), 어쨌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공황에 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아담 스미스로부터 꽃피기 시작한 경제학은 신고전주의자들을 탄생시킨 한계 혁명(marginal revolution1)을 거치면서 단순한 사회학적 위상을 넘어서서 사회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과학으로서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런 경제학의 위상 성장에 급제동이 걸리는데 그게 바로 대공황이다. 당대의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컨셉은 비교적 간단했다. 국가 혹은 정부가 감놔라 대추놔라 개입하지 않고, 개개인이 자율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면, 국가 혹은 사회 전체의 규모로 봤을 때에는, 그 사회에서 생산한 재화는 그 사회가 다 소비할 수 있다는 거다.

물론 품목이나 산업별로 보면 과잉 투자로 인한 과잉 생산이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사회 전체의 모든 경제 활동을 높고 보면 과잉 생산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 어차피 한정된 물질적, 인적 자원을 이용하는 상황에서 사회 내의 모든 상품에 대한 수요, 공급, 가격이 평형을 이루는 조건이 있을 텐데, 어느 한 상품에 대한 생산 과잉은 다른 품목에 대한 생산 부족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렇게 평형이 깨진 부분에 대해서 생산 과잉량은 가격 하락을, 생산 부족량은 가격 상승을 유발시키고, 소비자는 가격이 하락한 과잉 생산된 상품을 조금 더 소비하게 되고, 반대로 생산자는 가격이 상승한 생산 부족 상품이 더 많은 이윤을 남길 거란 판단 하에 이들의 생산을 더 늘리려 할 거고, 결국 다시 평형점을 찾아간다는 이야기. 이런 시나리오에 따르면 생산 과잉이 일어난 특정 산업은 가격 하락으로 일시적 침체를 겪을 수 있지만, 경제 활동 전체가 슬럼프를 겪을 수는 없다.

게다가 누군가의 소득은 다른 누군가의 지출이고, 누군가의 소비는 누군가의 소득이란 점에서, 경제 주체 모든 이들이 소득과 소비를 모두 취합할 경우 이는 제로섬일 수밖에 없다는 단순한 논리에 따라 사회 전체의 경제 주체들이 생산한 모든 것은 같은 경제 주체들이 소비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생산력이 소비력을 이끄는 공급주의 입장을 견지한다. 이를 비교적 잘 정리한 게 프랑스의 경제학자 세이(Say)로 이를 세이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이는 논리적으로 아주 간결하고 우아한 맛이 있어서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열병처럼 번지며, 경제학을 언제든지 과학의 반열에 올라서기라도 할 듯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1929년 주식 대폭락에 이어 거의 1930년대 내내 수요가 공급에 못 미치며 장기간의 지독한 경제 침체기에 접어들고 신고전주의 경제학 개념에 적신호가 들어온다.

이때 구세주처럼 등장한 경제학계의 구원 투수가 케인즈다. 그 이전까지 케인즈 본인도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신봉해 왔는데 1930년대의 대공황을 경험하며, 이론적으론 그럴 듯한데 실제로는 뭔가 안 맞는다고 느낀 그는 무료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ployment, Interest And Money, 줄여서 The General Theory)이라는 겁대가리없는 제목의 책을 1936년 내놓는다. 케인즈주의 경제학의 탄생이다.

그럼 케인즈는 그 동안의 이론에서 뭘 바꿨느냐? 일단 케인즈가 자신의 이론을 "일반 이론"이라고 명명한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의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가정한 "일반"은 틀렸다는 데에 있다. 신고전주의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고용이 안정돼 있고, 경제가 일정한 속도로 꾸준히 성장하는 평형점이 "일반"적이고, 이로부터 간혹 부분적 산업에서의 생산 과잉이나 부족 등의 불규칙한 패턴이 발생할 경우, 이에 대한 조정기간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런데 케인즈는 이런 시각을 완전히 뒤틀고는, 경제학자들의 머릿속 세상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 "일반"적인 상황은 경제가 비평형 상태에서 끊임없이 이쪽저쪽으로 기우뚱거리고 있고, 그러다 간혹 운이 좋으면 신고전주의자들이 말하는 평형점에 있을 때도 있다는 거다.

그러면서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중요한 개념을 한가지 도입한다. 바로 총수요(aggregate demand)라는 개념이다. 그전까지 수요와 공급을 바라보는 시각은 굉장히 국지적인 차원에서였다. 즉, 특정 상품의 가격이 X원이라고 할 경우 생산자는 이를 몇개나 만들지, 소비자는 이를 몇개나 살지를 고민하는 차원에서의 공급과 수요였다. 사회 또는 국가 전체의 모든 소비자들이 시장에 존재하는 모든 상품들에 대한 모든 수요에 대한 별도의 고려 따위는 없었다. 이는 무조건 공급을 따라간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케인즈가 총수요와 총공급이 따로 놀 수 있다고 본 거다.

그 원인--케인즈는 비이성적인 동물과 같은 본능(animal spirit)이라고 생각했지만--이 뭐가 됐든 총수요와 총공급이 따로 노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고, 총수요가 총공급을 밑돌게 되면 바로 대공황과 같은 대규모의 장기적 경기 침체가 일어난다는 거다. 이렇게 경기 침체가 일어날 때, 신고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시장이 이를 수정하지 못하는 건 가격과 임금이 끈적하기 때문(price and wage stickiness)이란 것, 즉 가격과 임금은 한번 오르면 이는 쉽게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즉,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시장이 작동하려면 과잉생산된 상품들의 가격이 떨어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들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임금도 같이 떨어져야 이들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서 과잉 생산량을 흡수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이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과잉생산된 상품들의 가격이 여전히 꽤 높다보니 이에 대한 수요가 계속해서 밑돈다는 뭐 그런 이야기.

그럼 이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여기서 케인즈에 따르면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논쟁의 핵심인 정부가 등장한다. 공급에 비해 밑도는 수요를 정부가 나서서 매우라는 거다. 즉, 정부가 재정정책을 이용하여(빚을 내서) 모자란 수요분을 채우면 이 돈을 받은 사람들이 돈을 쓰기 시작하고, 앞서 말했듯 한사람의 지출은 다른 사람에게는 소득이기 때문에, 이렇게 돈을 번 사람이 또 돈을 쓰고, 돈이 돌고 돌고 돌기 시작한다.

그래서 요약하면, 경제는 평형 상태에 있는 적이 없기 때문에, 정부는 불경기에는 재정 적자를 통해 수요를 창출하고, 경기 호황기에는 재정 흑자를 통해 수요가 넘치는 걸 막으라는 이야기.

이 이야기를 하자 물론 시장주의자들은 기겁을 하고 나섰다. 정부가 경제활동에 적극 개입하라고? 허걱, 님하 무슨 농담을 해도 그렇게 무서운 농담을... 시장주의자들의 요지는, 정부가 재정 적자를 낸다는 건 누군가로부터 돈을 빌려서 사용한다는 이야기. 결국 경기가 되살아나려면 시장 내에서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돈을 빌려 써야 하는데, 그 돈을 정부가 이미 빌려가버렸기 때문에 쓸 수 없고, 결국 경기 침체를 더 장기화시킨다는 거다. 가만히 냅두면 장기적으로는 시장이 알아서 조정할 걸 정부가 개입해서 초치지 말라능!

그리고 이에 대한 케인즈의 화답이 바로 "장기적으로는 시장이 해결해 준다고? 암, 좋은 이야기지. 근데 대체 얼마나 기다리면 되는 거유? 우린 다 죽고 나서?", 바로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라는 한마디. 즉, 기다리면 시장이 해결책을 찾을 거란 걸 부정한 게 아니라, 그 해결책을 얼마나 빨리 찾을 수 있느냐에 촛점을 맞춘 거다. 그걸 기다리는 동안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건 경제학자들은 아니라고 그냥 기다리라고 하는 건 무책임하지.

그런데 케인즈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뒤틀어서 해석한다. "뭐, 어차피 언젠간 우린 한번 죽는 인생. 두번 죽는 거 아니니까, 우리 죽고 난 그 뒷일은 알 바 아니지. 그러니까 (정부가) 돈을 여기저기서 계속 빌려서 흥청망청 쓰라고!" 물론 케인즈의 발언은 이런 의미가 절대 아니다. 이 논쟁을 조금 더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 학파별 경기 사이클을 바라보는 관점, 악덕투자(malinvestment), 유동성 트랩(liquidity trap), 절약의 역설(paradox of thrift) 등등 다양한 개념을 설명해야 하는데, 이미 글이 꽤 길어진 만큼 이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만 현재 유럽,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정부가 재정 축소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폴 크루그먼을 비롯한 케인즈주의자들은 "정말 1930년대를 다시 한번 보잔 거야? 미쳤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고, 반대편의 시장주의자들은 "그래, 그래, 그래야 시장 신뢰(market confidence)가 회복되고, 경기도 회복되지"라며 박수를 치는 상황. 그리고 일전에 한번 소개한 적 있지만, 이 시점에서 꽤나 적절한 영상이라 다시 한번 소개.

Fear the Boom and Bust



1 스미스, 리카도 라인의 정통 고전주의 경제학이 경제학 발전에 초석이 된 건 맞지만 이들이 경제학에 대한 모든 부분을 제대로 설명해낸 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이아몬드에 비해 물이 훠~얼씬 인간 삶에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물이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싸다. 왜 그럴까?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이 간단한 질문에 대한 그럴 듯한 답변을 하지 못하면서, 고전주의 경제학이 한때 그 존립의 위기를 맞는다. 그러다가 한계 효용(marginal utility)과 한계 가치(marginal value)의 개념이 등장하면서 고전주의 경제학의 기초가 더욱 탄탄해지게 되는데, 경제학에서 이 한계(margin)의 개념의 도입은 꽤나 혁명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한계 혁명이라고 부르고, 이를 토대로 부활한 고전주의 경제학을 신고전주의 경제학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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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ets can remain irrational a lot longer than you and I can remain solvent.
- (아마도) 존 메이너드 케인즈 (John Maynard Keynes)

시장의 비합리성에 대해 경고한 "시장은 우리가 부도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미쳐 있을 수 있다"는 이 한마디는 케인즈가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연원이 분명하지는 않다. 실제로 이 표현이 활자화되어 처음 등장한 것은 1993년 Forbes 잡지로 케인즈가 죽은지 거의 50년 후의 일이라고 하니, 어딘가 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건 사실. 어찌됐든 이 말을 처음 한 것은 케인즈라고 널리 알려져 있고, 평소 케인즈가 갖고 있던 시장에 대한 불신을 감안하면 그럴 법도 하다.

사실 우리가 케인즈 경제학 혹은 수정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 자체가 대공황을 겪으면서 케인즈 본인의 경제철학이 크게 요동친 결과로 탄생한 것인데, 그전까지만해도 당대의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케인즈도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자였다.

문제는 1929년 미국 주식 시장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대공황이었다. 그로 인해 케인즈 본인도 큰돈을 잃었는데--물론 케인즈는 대공황의 저점에서 더 사들여서 훗날 잃은 돈을 회복하고도 남았다--그런 시장의 극심한 변덕을 보며,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갖고 있던 시장에 대한 맹신 가까운 신념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케인즈의 수정 자본주의의 탄생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이야기가 좀 많이 샜는데,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수정 자본주의가 뭔지에 대한 이야기는 훗날로 미뤄두기로 하고, 다시 케인즈의 발언으로 돌아가자. 경제학이나 회계에서 "solvent"라 함은 대금을 지불할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바꿔 말해 어떤 경제 주체가 solvent의 반대인 insolvent가 되면 흔히 말하는 파산 신청을 하게 된다. 그런데 시장이 비이성적인 것과 지불 능력(solvency)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보통 언론에서는 우리가 맞이했던 IMF 위기와 같은 상황을 금융위기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사용하는데, 사실 금융위기에는 두가지가 있다. 유동성 위기(liquidity crisis)가 하나고, 지불 능력 위기(solvency crisis)가 나머지 하나다. 이 두가지는 어떻게 다를까?

자, 내가 이발소를 차렸다고 하자. 은행에서 자본금을 빌려서, 가게를 얻고, 이발 도구, 의자, 손님들이 앉아 기다릴 수 있는 소파 등을 다 구비. 이발비는 9000원. 손님들이 만원짜리를 내면 천원을 거슬러줘야 할 것 같아서 일부러 은행에 가서 천원짜리를 넉넉히 바꾼다고 바꿔다가 계산대에 넣어뒀다. 그리고 첫날 손님을 받았는데 21명의 손님이 왔는데 전부 만원짜리를 낸 거다. 그런데 손님이 20명은 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천원짜리를 20장밖에 준비하지 않았던 거다. 20번째 손님까지 딱 받고 나니 만원짜리는 새로 20장이 생겼는데, 천원짜리는 한장도 안 남았다. 21번째 손님이 만원짜리를 내는 순간, 어라? 거스름돈 천원이 없네. 그런데 이 경우 정말 돈 천원이 없는 게 아니다. 돈은 20만원이 있지만, 당장 필요한 천원짜리 한장이 없는 거다.

이게 바로 유동성 위기다. 자신이 갖고 있는 자산의 현금 가치는 충분하지만, 갖고 있는 자산의 종류가 당장 필요한 자산의 종류와 일치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위기. 이걸 왜 유동성 위기라고 부르냐고? 사실 조금 기이한 예를 들었는데, 자산의 종류에 따라 그 자산의 유동성에 차이가 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모든 거래의 기본인 현금이 가장 유동적인 자산으로, 어디 가서 돈 내는데 안 받는 사람은 없다. 그 다음에 채권, 주식 등의 금융 상품 등이 있을 거고, 우리가 흔히 부동산이라고 하는 건물이나 땅 따위가 유동성이 가장 낮은 자산이다. 그래서 "부동"산이다.

그러면 지불 능력 위기란 뭘까? 앞선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내가 이발소를 차렸는데, 한달이 넘도록 손님이 한명도 없다. 가게 임대료, 전기세는 물론이고, 이발소를 차리기 위해 대출받은 돈 이자도 내야 되는데, 수중에 현금이라곤 없는 거다. 여기까지만 얼핏 보면 유동성 위기와 유사하지만, 다음에서 차이가 있다. 신용불량자가 될 순 없으니까 돈은 어디서 구해야겠고, 그래서 가게에 있는 물건 중에 당장 급하지 않은 물건들을 팔기 시작한다. 어차피 손님이 없으니 대기용 소파부터해서 이발용 의자도 3개가 있던 것 중 2개는 팔아치우고 등등. 그렇게 물건들을 하나둘 팔아치우기 시작해서 땜방질을 하다보니 몇달만에 결국 갖고 있던 물건을 다 팔아치웠다.

어라? 그런데 물건을 다 팔아치웠는데도, 갚아야 할 돈을 다 못 갚았네. 아무래도 중고품이다보니 처음에 살 때 줬던 값보다 싸게 팔 수밖에 없었던 거다. 결국 자기가 갖고 있는 자산 가치의 총량이 자신의 채무의 총량보다 작은 상황, 뭘 해도 필요한 돈을 갚을 방법이 없는, 힝, 존망했으의 상황이 바로 지불 능력 위기다

자, 그럼 시장과 이게 어떻게 엮이는지 살펴보기 위해 잠시 기업의 대차대조표(balance sheet)에 대해 이야길 해보자. 기업의 대차대조표란 가계부라고 보면 된다. 약간의 차이라면 가계부는 현금 유통 위주로 작성하지만 대차대조표는 현금, 채권, 부동산 등 기업의 모든 자산과 부채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The Office의 Dunder-Mifflin 같은 종이/사무용품 회사를 생각해보자. 이 회사의 자산은 사무용품을 생산하는 공장과 각종 생산 시설, 사무직 직원들이 일하는 건물과 그 건물 내의 책상, 컴퓨터 등이 있을 거고, 사무용품을 도매나 소매상에게 넘긴 후 아직 받지 않았지만 곧 받아야 할 대금이 있을 거다. 그리고 회사가 갖고 있는 현금 등이 이 회사의 자산에 해당한다. 반면에 회사가 발행한 채권, 종이 생산을 위해 원자재를 받았는데 아직 지불하지 않은 대금, 직원들에게 아직 지급하지 않은 임금과 보너스 따위가 있다면 이는 회사의 부채에 해당한다.

이 자산의 총합에서 부채의 총합을 뺀 값을 회사의 순이익이라고 봐도 좋고, 회사의 실질적인 가치로 회사 주식의 총가치(=발행된 주식의 수 x 주가)는 이를 반영하는 게 정상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이값이 0보다 크면 회사는 지불능력이 있다(solvent)고 한다. 그런데 이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데에는 규칙이 있다. 현금만을 취급하는 가계부와 달리 다양한 종류의 자산과 부채를 포함한 대차대조표에서 이들 자산과 부채의 현금가치를 어떻게 매기느냐는 상당히 애매한 문제다.

각 가정이 가계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한다고 해보자. 이 경우 자산에는 소유하고 있는 아파트, 시골에 쬐끄만 텃밭이라도 있다면 이런 땅뙈기, 집안의 온갖 가구 및 가전 제품, 은행 예금, 적금, 펀드, 주식 등이 자산에 해당하고, 은행 대출, 사채, 아직 완납하지 않은 카드 할부금, 자동차 할부금 등이 있다면 이가 부채에 해당한다. 이중 아파트, 땅, 가구 등의 가격은 얼마로 잡아야 할까? 은행 예금이나 가계 부채 등은 어차피 현금으로 돼 있으니 크게 상관이 없고, 펀드나 주식도 시세에 따라 금방 금방 현금화 할 수 있으니 크게 문제가 없다. 그런데 부동산의 경우 사실 공시지가라는 게 있고, 시장 거래 가격이 있는데 이게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면 내 아파트 값은 공시지가에 맞춰야 하나, 거래 가격에 맞춰야 하나? 흠...

이 문제는 보통 법으로 정하는데 기업체들은 시가평가(mark to market)를 하게 돼 있다. 이는 회사의 장부, 즉 대차대조표에 Market value(시가)에 따라 mark(표시)하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공시 지가나 다른 임의의 가치 결정 척도가 아닌 시장 거래가에 따라 자산과 부채의 가치를 매기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시장이 개입한다.

그러면 2008년에 터진 미국의 서브프라임발 부동산 위기를 통해 케인즈의 발언을 다시 살펴보자. 은행들의 경우, 자산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다양한 형태의) 대출이다. 은행에서 빌린 돈이, 돈을 빌린 사람에게는 부채라면, 은행의 입장에서는 돌려 받을 돈이기 때문에--물건을 미리 넘기고, 미처 받지 않은 대금과 마찬가지로--자산에 해당한다. 그리고 다른 자산들과 마찬가지로 대출도 은행들끼리 사고 파는 게 가능하다. 예를 들어 갑은행이 10사람에게 금리 5%로 20년 만기 1억원짜리 대출을 10번 해줬다고 하자. 이 10명이 이 빚을 모두 꼬박 갚는다면, 이 은행은 20년간 총 10억의 수익을 올리게 될 거다. (계산의 편의를 위해 복리가 아닌 5% 단리로 계산하자. 5% x 20년은 100%에 해당하니 1억을 빌려주면 그 이자 수익이 그 100%인 1억. 10명이니 10억.) 그렇지만 10명이 다 돈을 꼬박 갚을 것 같진 않고, 갑은행이 그동안의 경험으로 판단하건데, 6명은 돈을 다 갚겠지만, 4명 정도는 10년만에 배째라고 할 것 같다. 그 경우 실제 수익은 8억원.

그런데 뒤늦게 은행을 차린 을은행이 비슷한 대출 조건을 내걸었는데, 돈을 빌려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을은행은 갑은행에게 원금 10억을 포함해서 총 13억을 줄 테니 자신들에게 그 대출을 넘기라고 한다. 을은행 입장에서는 13억원을 주고 (원금 포함) 18억원을 돌려 받을 수 있다면 그래도 5억원이 남는 셈. 그런데 갑자기 병은행이 끼어들어서 자기에게 15억원에 넘기라고 한다면 갑은행은 병은행에게 이 대출을 넘기는 게 유리. 이때 갑은행 입장에서 이 거래에 응하느냐 응하지 않느냐는 다양한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갑은행이 앞서 말한 유동성 위기를 맞아서 지금 당장 현금이 급하다면, 자신들이 생각하기엔 18억짜리도 15억에 팔아야 할 수도 있다. 또 한가지는 갑은행은 이 대출들로 18억을 벌 거라고 예상했는데, 정은행은 20억을 다 돌려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 19억원을 제시한다면 갑은 얼씨나 하고 거래에 응하는 시나리오도 가능하다. 이렇듯 은행들 사이에서 다양한 계산에 따라 자신들이 갖고 있는 대출 형태의 자신을 사고 파는 일은 자주 벌어진다.

만약에 많은 은행들이 10억을 빌려주고 20년에 걸쳐 18억씩 회수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은행들이 너도나도 할 것없이 대출을 해줄 거다. 이게 사실 서브프라임의 시작이다. 집값이 꾸준히 상승함에 따라 일반적으로 대출 위험 대상인 서브프라임 대출을 받은 사람들도 평소보다 돈을 꼬박꼬박 잘 갚기 시작한다. 그러자 은행들이 18억짜리라고 예상했던 이 자산 가치가 그 이상일 수 있다고 판단, 이런 대출 자산을 서로 조금이라도 더 많이 모으기 위해 경쟁을 하게 되고, 이런 대출 자산의 가치는 그 상한선인 20억에 육박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 자산 가치를 시가평가하게 되어 있음에 따라, 이런 서브프라임 대출을 많이 해준 은행들의 대차대조표에서 부채쪽은 그대로인데 자산쪽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돈을 다 돌려받으려면 2-30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완전히 확정되지 않은 수익임에도 시가평가에 의해 과평가된 거고, 이런 걸 우린 흔히 버블/거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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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ra's Wagon of Fools. 1600년대 초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을 비꼰 Hendrik Gerritsz Pot의 작품.


자, 어떤 갑은행이 현금 100억을 포함한 총 1000억의 자산과 980억의 부채를 갖고 사업을 시작 18억짜리라고 예상되는 대출 10개를 해줬다. 그러자 자산이 1080억으로 늘었고, 부채는 980억 그대로. 그런데 18억짜리 대출자산의 가치가 20억으로 오르면서 은행의 자산이 시장에서 1100억으로 평가가 되게 된다. 그런데 집값의 거품이 꺼지면서 대출을 받아간 사람들이 돈을 제때에 못 갚아 나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예상했던 20억을 다 돌려 받을 수가 없다는 걸 알아차림에 따라 이와 비슷한 자산을 갖고 있던 은행들이 전부 위기감을 느끼고 이 대출 자산을 팔아치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를 팔아치우는 은행들이 점점 많이짐에 따라 이 자산 가치가 19억, 18억, 17억으로 점점 떨어진다. 갑은행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총 자산이 1100억에서 1090, 1080, 1070으로 점점 줄어드는 거다.

그런데 은행들이 자신들이 발행한 대출들을 다시 검토해봄에 따라, 어차피 쥐고 있어봐야 원금 회복도 못할 것 같다고 판단, 지금 건질 수 있는 것만이라도 건지자는 판단에, 이 자산들을 10억, 9억에도 팔아 치우기 시작한다. 그러자 갑은행의 총 자산이 이제 990억까지 떨어졌다. 어라? 이 자산의 시장 가치가 8억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에는 갑은행의 총 자산은 총 부채보다 적어지게 되고, 이는 갑은행이 지불능력이 없어진다(insolvent)는 말이다!

그런데 시장이 처음에는 18억정도로 예상한 자산을 20억이라고 잘못 판단한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패닉한 바람에, 사실 20년을 끝까지 기다렸으면 12억 정도는 회수할 수 있었음에도, 성급하게 7억에 팔아치우기 시작한 거라면? 이게 케인즈가 말한 "Markets can remain irrational a lot longer than you and I can remain solvent."이다. 시장이 한번 패닉 모드에 들어가면, 이 분위기에 휩쓸려서 쓰러지지 않아도 되는 회사들이 쓰러지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물론, 실제로 서브프라임 위기로 쓰러진 은행이나 펀드들의 대부분은 쓰러질만했다는 게 중론이다. 다만 터무니 없이 비쌌다는 것 외에는 아직까지도 이들 자산이 실제로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는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결국 시가평가(mark to market) 시스템의 문제인데, 이는 사실 자산 가치를 매기는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는 사실과도 맥이 통한다. 나의 집이 나에게 금전적으로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시장에서 내 집과 유사한 집이 얼마에 거래가 되는가를 내 집의 가치 척도로 삼는 건 비교적 합리적인 선택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격이 오를 때는 여기에 거품이 있는지 의심하기보다는 거의 항상 이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가격이 떨어질 때가 되면 갑자기 시장에 문제가 있다라고 호들갑을 떤다는 거다. 실제로는 가격이 떨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가격이 오를 때도 문제가 있을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최근에 거품의 신호를 찾을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있는 물리학자(네, 오타가 아니고 물리학자 맞습니다)들이 있는데, 관련 논문 첨부. 이미 글이 충분히 길어진 관계로, 이 논문 내용은 다음에 또 시간 내서 잠깐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논문 : The Financial Bubble Experiment: Advanced Diagnostics and Forecasts of Bubble Terminations Volume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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