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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02 촛불을 밝힌 서울의 풍경 (12)
어제는 서울에 올라간 김에 저녁에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촛불 문화제에 참가했다. 미국 가 있는 동안 효순/미순 추모회, 탄핵, 김선일 사건 등을 모두 바다 건너에서 지켜보기만 해야했던 내게,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3월 20일에 있었던 가장 크고 조금은 과격했던 반전 시위 이전에 수차례의 반전시위가 있었음) 시카고에서 펼쳐진 반전 거리 시위 이래로 처음으로 참가한 대규모 시위였다.


1.

내가 미국과 한국에서 경험한 두번의 집회는 모두 평화적인 가두행진이란 점에서는 같았지만, 경찰의 대응법은 크게 달랐다. 지금의 어렴풋한 기억으로 시위는 미시간 애비뉴와 와커 드라이브가 만나는 곳에서 시작해서 시카고 다운타운을 크게 한바퀴 돌고 끝났다. 시위 출발지에 도착해보니 시위대의 동선은 이미 결정돼 있었고, 이에 대한 경찰과의 사전 조율이 있었는지, 시위가 지나는 곳은 차량 통제를 이미 해둔 상태였다. 동선을 따라 좌우로 경찰이 간헐적으로 눈에 띄긴 했지만 이는 운동 경기장이나 콘서트장 등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안전을 위해 약간의 경찰을 배치해두는 이상은 아니었다.

반면에 서울의 경찰은 괴상한 집시법--정확한 집시법이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찾아보기 조금 귀찮기도 하고--을 핑계로 불법 시위 단속이란 핑계로 닭장차와 전경을 배치, 거리 곳곳, 특히 청와대로 향하는 길을 막아놓고 시위대를 사냥감 몰 듯 살살 몰아서 가둬둘 생각이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길 바란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물론 그게 안 되자 살수차와 특공대가 동원되는 엽기적인 상황이 펼쳐졌다. 이쯤에서 '근조, 대한민국' 한번.


2.

2003년의 시위에 절박함은 없었다. 부시 정부에 대한 불신과 염증이 있었지만, 당시에 정부가 행사하는 폭력의 대상은 지구 반대편에 있었다. 그 전쟁에 반대하던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책임감을 느꼈을지언정 이게 정말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문제라는, 이 전쟁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없었다. '나는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지는 않았다'는 자기만족 따위를 느끼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 시위에 두번 다시 나갈 수 없었다.

어제의 시위는, 길거리에 자리 깔고 앉아 떡, 김밥, 맥주를 까먹으며 소풍 나온 듯한 사람들, 유모차를 끌고 미는 젊은 부부들, 십대의 반항기를 분출할 더없이 좋은 출구를 찾은 듯 신나 보이던 교복 차림의 학생들, 그리고 이번 시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우리의 예비군 등 다양한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웃고 즐기느며 거리를 활보하는 여유로운 모습 속에서도 '정말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느껴졌다. 이들에게는, 그리고 내게는 이명박의 백기투항 내지는 퇴진을 향한 진심어린 염원이 있었다.


3.

이쯤에서 사람은 끼리끼리 논다는 간단한 사실은 날 항상 걱정스럽게 만든다. 이는 만명이 있으면 만가지 의견이 있는 게 정상이라는 내 평소 지론과 맞물려, 나로 하여금 항상 여론의 왜곡에 대한 불안(?)을 갖게 만든다. 뭐, 아주 간단한 예로 내 주변에는 한나라당 지지자만큼이나 민노당이나 진보신당 지자자들이 많지만, 국민 여론의 현실은 이런 내 주변 상황과 전혀 다르다. 따라서 나와 정치적 목적을 공유하는 흐름을 읽게 되더라도 이게 전체 여론의 어느 정도를 반영하느냐의 의문을 달고 살 수밖에 없다. 물론 어제처럼 수만명의 사람들이 한가지 목적을 위해 운집하기 위해서는 (경찰 추산 4만, 집회 주최측 추산 10만이라는데 내가 봤을 땐 5만명에서 7만명 사이였을 것 같다. 시카고 마라톤시 출발점에 3만 5천명 정도가 운집하는데, 그 두배를 넘을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나는 솔직히 집회 추최측 또한 경찰측이 거짓말을 하는 것과 똑같은 동기로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을 갖고 있다. 내가 항상 객관적이지 않듯이, 나와 정치적 목적이 같은 사람들이 매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갖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과 정치적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그보다 수십-수백배 많아야 하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의 의중을 헤아리는 일은 항상 조심스럽다.

이런 나의 불안을 어제 저녁 택시 기사 아저씨와 다른 사람들도 아닌 내 가족들을 통해 환기해야만했다. 철저하게 체제순응적인 어머니는 내가 광화문 앞에 있단 사실을 알고는 성을 내며 얼른 귀가 명령(?)을 내렸다. 생까고 버텨볼까 하다가 계속되는 귀가 강요 전화(?)에 결국은 경복궁 앞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를 뒤로 하고 시위장을 떠났다. 자정을 넘어 시위가 슬슬 과격해지는 조짐을 보이던, 진짜 사람 머릿수 하나라도 더 보태야할 타이밍이었던 터라 돌아서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렇게 광화문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는데 택시 기사 아저씨는 '집회도 아니고, 데모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거리들이냐'며 무척이나 짜증을 내셨다. 그렇게 고모집에 돌아가서 만난 내 가족들 중 그 누구도 내편이 아니었다. 특히나 전경 출신인 사촌동생은 쌍욕까지 섞어가며 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쏟아냈고, 울 엄마나 고모는 그런 사촌동생의 불만에 적극 동조하셨다.

엄마나 고모, 사촌동생 중 그 누구도 지금 이명박이 잘 하고 있다고 여기진 않으신다. 아마도 택시 기사 아저씨도 이명박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으시리라. 그렇지만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들을 보호할 누군가가 있다면 그 누군가는 정부라고 믿고 있다, 정부에 '반항'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집회에 안 나가고 가만히 있었으면 왜 살수차를 뿌리고, 왜 연행하겠냐는 거다.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체제 전복을 꿈꾸는 데모꾼들의 사치품 정도로 믿는 이들에 맞서 나는 무기력했다. (자유와 권리라는) 사회적 이상이 아무리 고매할지언정, (통제된 도로를 이리저리 피해가며 택시를 몰거나, 전경 출신이라는, 혹은 전경의 고충을 모성애를 통해 경험하는) 개인의 체험을 넘어서는 사회적 이상을 갖기란 그렇게나 어려운 거다.


4.

이들의 모습위에 포개지는 지금 떠오르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명박이 자신의 하야 여부를 국민투표에 붙이자는 제안을 하는 것. 이렇게 될 경우, 사실 지금의 촛불 집회 세력이 분열될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의 실망스러운 정책들로 국민들에게 불만이 쌓여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이 모두 이명박 퇴진을 원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단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중들보다는 아무래도 조금 치우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로는, 이명박의 강수에 움찔하며 그 자리에서 집회에서 이탈하는 세력이 조금 나올 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제로 국민투표를 한다면 그 준비한답시고 최소 2주는 걸릴 텐데, 그 사이에 집회를 계속 할 수도 쉴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집회를 계속할 경우, 방금 언급한 두 세력이 '국민투표하기로 했으면 되지 왜 계속 저래?'라며 반정부 집회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될 수 있다는 거. 반면에 그 기간 동안 집회를 쉰다면 반정부 정서가 냉각될 수도 있다는 거. 물론 전제 조건 하나는 그 2주 가량 이명박이 납작 누워 자살골을 넣지 않아야겠지. 워낙에 무식한 양반이라 그 정도도 못참을지 모르긴 하지만, 참모진이 조금만 똘똘하다면 그 정돈 통제하겠지. 사실 대통령이 물러난다고 생각하면 의외로 국민들 사이에서 '국정공백'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 있다. '아무리 무능해도 없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어'라는 감성적인 사고는 안타깝게도 전염성이 강하다. 대통령의 하야를 국민투표를 통해 할 경우, 그 정치적 책임이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그리하여 국민투표 결과 이명박을 붙여놓자는 결과가 나올 경우, '거봐라, 그렇게 반대하고 날뛰더니 결국 한줌밖에 안 되는 놈들이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냥 날 뛰는 바람에 괜히 쫄았다'라며, 앞으로 모든 정책을 강행할만한 강력한 핑계거리를 제공하게 된다는 거다. 그 이후로는 모든 국민적 반대가 소수의 날뜀으로 치부될 테니까... orz 정말 불도저를 보게 될 거다. 지금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 가장 강경한 주장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실질적으로 조정이 필요한 세부 정책 문제에 대한 물타기를 하는, 아주 고도의 정치적 움직임이다.

다행히도, 어쨌든 이 시나리오는 이명박 입장에서 위험 부담도 그만큼 크다. 성공하면 대박이지만 실패하면 정말 쪽박. 이제 겨우 취임 100일에 좀 심한 강수이긴 하다. 그런데 앞으로 퇴진 압력이 정말 강력해지면, 바로 하야하는 대신에 국민투표를 제안할 가능성은 충분. 그때가면 밑져야 본전이니까.


5.

한때는 내 목소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무게감 있게 다가갈 수 있도록, 내 개인의 힘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힘은 아무리 크다해도 충분히 크지 않다. 대통령 조차도 결국은 저지경으로 코너에 몰리고 말았잖은가. 지식인이랍시고 펜을 아무리 휘갈겨도 그들이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경우는 없다.

4.19도, 6월 항쟁도 어느 강력한 개인의 의지나 필력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때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건 개개인이 자신의 미약한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각오하고도, 그 힘을 보탤 용기를 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답답하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하는 거다.

4.19 때나 6월 항쟁 때 본인은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하고도, 그 열매를 얻어먹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그런 경험은 '굳이 내가 아니어도'라는 생각을 키우게 만들었을 거다. 조금 패배주의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생각 때문에 움직이기 싫다면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 그것 또한 그들의 자유다. 그렇지만 그 작은 힘을 보탤 용기를 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만은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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