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민)자본주의나 물질만능주의가 인간성을 파괴한다는 이야기의 취지는 십분 이해하겠는데, 이걸 받아들이더라도 항상 그 다음이 문제다. 왜냐하면 사람이 금전적 손익을 초월한 사랑, 우정, 박애에 감동하기는 쉽지만, 그런 거에 감동하는 것과 실천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

계산적 인간관계의 원흉이 돈이나 물질이라고 해서, 이것들 없이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뭐, 아주 극단적인 경우라면 물물교환을 하면 되니 돈이나 자본은 없애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돈이 없어진다고 비용의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예를 들어 내가 텃밭에다 토마토 농사를 지어서 이웃들에게 나눠줄 경우, 이웃들로부터 돈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토마토를 생산하는 비용, 소위 시간과 노력이 들지 않은 건 아니다.

보통은 돈을 바라지는 않더라도 이웃들이 고마워하고 맛있게 먹어주기를 기대하고, 또 보통은 (설령 맛은 좀 없더라도) 이를 고마워 한다. 이는 내가 시간과 노력이라는 형태로 들인 비용을 상대방이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비교적 자연스러운 행위로, 이웃들이 그런 나의 비용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사람에 따라선 섭섭해하기도하고, 불쾌해하기도 하고, 다양한 반응이 나타난다.

본질에는, 내가 들인 비용을 상대방이 인정해주느냐의 문제가 놓여 있는 거고, 금전 거래는 (다소 친밀감은 떨어지지만) 이런 비용을 인정해주는 한가지 형태에 불과하다. 돈이냐 아니냐가 아니고, 상대방의 비용을 흔쾌히 인정하고, 내가 상대방을 위해 비용 부담을 할 준비가 돼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자본주의가 문제야"라며 뒤엎어서 사회주의든 제3의 어떤 체제든 만들어내봐야, 그 시스템 속에서 금전적 손익을 초월한 인간관계란 허울에 불과, 결국에는 "우리가 째째하게 돈 몇푼 따지는 그런 사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돈(비용)은 내가 기꺼이 낼께"보다는 "우리가 째째하게 돈 몇푼 따지는 그런 사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돈(비용)은 너가 기꺼이 지불할 거지?"의 형태로 남의 골수를 뽑아먹는 기생충만 만들어낼 뿐.

사실 이런 풍경은 이미 우리가 생각하거나 원하는 것보다도 훨씬 자주 벌어지고 있는데, 재산 분배를 놓고 형제들이 싸우는 것도 "야만스럽게말야 형제들끼리 재산 갖고 싸우면 안 되지.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이렇게 재산을 나누는 게 정당한데, 설령 네가 보기엔 정당하지 않더라도) 치사하게 꼬치꼬치 따지지 말고 그냥 이것만 먹어"라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 형제들이 한 사람도 양보 없이 전부 다 이런 포지셔닝을 취해버리면 싸움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잖아?

결국 문제는 사회 전반에 걸친 "우리가 째째하게 돈 몇푼 따지는 그런 사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돈(비용)은 너가 기꺼이 지불할 거지?"라는 인식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째째하게 돈 몇푼 따지는 그런 사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돈(비용)은 내가 기꺼이 낼께"로 전환시킬 수 있느냐인데 이게 정말 자본주의 vs 사회주의의 문제일까?

@ 물론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계산적 인간관계의 틀 안에 있기 때문에, 금전적 손익을 초월한 인간관계조차도 "우리가 째째하게 돈 몇푼 따지는 그런 사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돈(비용)은 너가 기꺼이 지불할 거지?"의 형태를 띌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는 확신은 잘 안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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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MB가 '취업 안 되는 젊은이들 기술 교육 시키자'는 발언을 했는데, 이에 대한 이택광님의 반응은 조금 과민반응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이 발언과 이 해석이 실험이 좀 딜딜 말리는 타이밍에 나와버리니 꽤나 의미심장하다. 내가 하는 일이란 게, 정말 딱 인문학만큼 경제적 가치 창출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하는데, 비용은 그에 비해 천문학적으로 많이 드니 사실 경제적으로 쓸모없기로 말하자면 내가 인문학자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다.

사실 어디가서 물리학한다고 나에 대해 소개하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떤 걸 연구하냐?'는 질문에 가차없이 따라 오는 게 '그래서 그걸 어디에 쓰냐?'는 질문이다. 그럴 때면 정말 과학과 기술이 동치인 시대를 살고 있구나란 실감이 난다. 나는 물론 꽤나 자랑스럽게 '써먹을 데 없다'고 대답하지만, 대부분 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거나, 대답하기 귀찮아한다고 생각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어딘가엔 사용할 수 있으니 연구할 거 아녜요'라며 집요하게 캐묻는다.

물론 이에 대한 모범답안이 몇가지 있긴 하다. '지금은 뭐에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아직 모르는 걸 더 많이 알고 있는 후세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기술일 수 있다'거나 '그저 인간의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순수한 호기심의 발로다' 따위가 그거다. 이런 수사들을 누가 언제 처음으로 읊조렸는지는 알 수 없다만, 그 최초의 누군가는 그 당시에 이런 수사들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었거나, 나름 섹시해 보였을 수도... 그렇지만 요샌 사실 좀 진부하다. 가끔은 나조차 믿지 않으면서도, 더 좋은 답이 없어서 아무생각 없이 내뱉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더 나은 답이 없다는 거, 그보다는 더 나은 답이 없을까 별로 고민해보지 않는다는 거,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다.

사실 교육기관과 학문의 발전 과정을 보면, 근대 과학의 시초가 된 대부분의 아이디어들은 근대 이전의 봉건제시절에 탄생했는데, 당시 교육의 기회라는 건 대부분 노동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지배계급에게 한정돼 있었다.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이 분명한 봉건제도 하에서 노동계급은 노동하는 동안 지배계급은 남는 시간 동안 만물의 근원에 대해 고민하거나,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을 품는 것을 노동계급에게 정당화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과학이든 철학이든, 혹은 예술이든 '나한텐 재미있으니까'라는 순수한 관심 이외의 그 어떤 목적을 갖지 않아도 됐다.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단 하나의 잣대로 세상사를 가늠하는 천민자본주의가 인문학이나 순수 과학, 혹은 인간성을 죽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사실 이들을 죽이는 건 자본에 힘을 실어준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개념 위에서 출발한 민주주의일 거다. 무슨 이야기냐면 '만인이 평등하다'는 자유민주주의 하에서 과학과 인문학의 당위성은 봉건제 하에서의 그것과 완전히 달라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만인이 평등하다면 특정 집단의 노동의 결과를 다른 집단이 정당한 댓가없이 취할 수 없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노동하는 동안, 나는 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에 일년 365일을 다 사용하느라 노동을 하지 않았/못했다면, 누가 잘못한 걸까?

물론 오늘날 소위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지식의 생산은 노동이다. 대부분의 과학자, 인문학자, 예술가에게 물어도 자신이 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다. 농부가 1년 내내 땅을 일궈 쌀을 생산하듯, 책, 실험기구, 악기 등과 매일 씨름하며 인간의 지식의 지평을 넓히고 새로운 예술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고 할 거다. 그렇지만 문제는 "누구를 위해서?"인가 이다.

이건 자본주의가 지식과 진리, 문화를 상품화하거나 돈거래로 만드는 것과는 관계 없는 문제다. 내가 A만 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서 B를 생산하여 '먹고 살기'위해서는, 누군가는 내게 B의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즉, 나는 A의 결과물 B를 누군가에게는 자본 혹은 B가 아닌 다른 어떤 재화와의 교환 가치가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야 가능한 거다. 여기서 B가 무엇이냐, 그리고 댓가를 지불하는 그 누군가가 누구냐는 전혀 상관없다. 지식/문화 생산을 취미활동이 아닌 직업으로 만드는 순간, 지식/문화의 상품화는 일어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는 그 가격을 누가 어떻게 매기느냐의 차이일 뿐...

이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이 평등하긴 한데, 누군가의 노동의 결과는 당연히 상품화되는 거고, 누군가의 노동의 결과는 상품화하기에는 너무나 고귀하다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실제 문제는 지식의 상품화가 아니라, 지식의 가치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본주의에서 시장이 지식의 교환 가치를 너무 싸게 매겨 버린 거다. 그런 현실에서 이공계/인문학 기피와 맞물린 한/치/의/법/경영대로의 급속한 인력 이탈 현상은 놀랄 일이 아니다. 

과학하는 사람들이 '과학은 중요하다', 인문학하는 사람들이 '인문학은 중요하다'고 믿는 건 당연하다. 과학이 혹은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과학을 하고 인문학을 하고 있는 거잖은가? 그런데 시장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결국 정부의 역할은 때로는 시장의 횡포 때로는 시장의 삽질을 바로 잡는 건데, 어라, 정부는 꼼짝도 않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게 빠졌는데, 정부가 이 중개자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정부는 시장과는 다른 가치 판단의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의 철학과 정책, 매스미디어의 포지셔닝 등이 모두 나름의 역할이 있는 건 맞다. 그렇지만 이런 가치 판단의 기준은 어디선가 저절로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흥미로워하는 것을 남들이 흥미로워하지 않을 때, 그게 흥미로운 일이란 걸 납득시킬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다. 그럼에도 정작 학계에서 과학을, 인문학을 살리라고 하면서 정작 뱉어내는 수사들은 '음식이 육체를 살찌운다면, 문화는 정신을 살찌운다', '돈이 행복을 살 수는 없다' 따위 뿐이라면--이런 주장들이 왜 참인지를 효과적으로 납득시킬 능력이 없다면--딱,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거다'라고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자고 주장하는 것만큼의 설득력을 가질 뿐이다.

노동계급이 사회 대부분의 부를 생산함에도, 정작 그 부의 대부분을 누리는 게 소수의 지배계급인 사회 구조에서, 지배계급이 지식과 문화의 대부분을 생산하고 동시에 이를 누리는 건 당연하다. 오늘날의 과학자, 인문학자, 예술가들이 그 당시의 지배계급이 향유했던 그 특권을 부러워하는 것 역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에 대한 낭만에 사로잡혀 자본주의와 정부의 어리석음을 향해 손가락질한다면, 이는 집단 이기주의에 기반하여 내게도 그 당시 그들이 누렸던 '특권'을 달라는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쌀 농사꾼이 고객을 상대로 빵 대신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하듯, 우리는 핸드백 하나를 사는 것보다 책 10권을 읽는 게 더 좋은 이유, 혹은 아이폰 같은 신제품 하나 더 개발하는 것보다 초유체의 신비를 규명하는 게 더 좋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단순히 '책 10권 안에는 새 핸드백 하나로는 누릴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라면 '나는 새 핸드백 하나 사는 게 책 10권 읽는 것보다 좋던데?'라고 되돌아오는 한마디만큼이나 허탈하잖은가.

내가 생산하는 지식과 문화를 단순히 돈으로 교환하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그 진정한 가치에 대해 세상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한 자본주의가 세상을 망친 게 아니라, 내가 생산하는 지식/문화는 천박한 자본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고귀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에 눈이 멀어서, 그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한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지식인들이 자기 무덤만 파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거다. 원래가--인류의 지식/문화는 돈으로 매길 수 없다는 믿음처럼--나한테는 너무도 당연한 게, 남들한테는 완전 딴 세상 이야기이게 마련이다.

@ 언제나처럼 답은 없이 문제제기만...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난 내가 하는 일에 왜 국민의 혈세를 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포기한지 오래. 그냥 나는 이거 하고 싶은데, 국가가 (국민들을 대표해서) 이 일에 돈 들이겠다면 땡큐고, 싫다면 그게 정상이지 싶음... -_-a 진리를 밝혀내기 위한 인간의 무한한 호기심이란 따지고 보면 무한한 호기심이 있는 인간들도 더러는 있다는 얘길 아전인수식으로 비틀어 버린 것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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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있을 땐 TV를 참 열심히 봤다. 요새 국내에도 미드가 많이 소개되는데 참 볼만한 것들이 많았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Deadwood, The Wire, Firefly 같은 프로그램에서부터 국내에도 꽤 많은 팬을 확보한 House, Dexter 까지. 거기다 시사 코메디쇼인 Jon Stewart Daily Show나 Colbert Report도 거의 매일 꼬박꼬박 챙겨봤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끄는 24(처음 세시즌은 열심히 봤다), Lost, Prison Break 등은 그다지 재미있는 줄 모르겠다.

확실히 내 취향은 한국인의 대중적 취향과는 빗나가는 것 같다. 미국에 있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아쉬운 부분 중 하나는 볼만한 TV 프로그램이 정말 없다는 거다. 요새 열심히 챙겨보는 TV 프로는 끽해야 100분 토론이다. 특히 정치 이야기가 나올 때면, 딴나라당의 딴소리에 혈압 오르는 재미가 너무 쏠쏠해서 도저히 못 끊겠다, 이건. ㅡㅠㅡ 그 외에는 채널들 돌려봐야 뭐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는 그나물에 그밥 버라이어티쇼들만 넘쳐난다. 근데 이게 뭐 그냥 사람들 여럿이 앉아서 잡담만 한다. 버라이어티쇼에 버라이어티가 없다. orz TV를 보는 일이 피로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한국은 내수시장 규모가 작기 때문에 한국 경제의 활로는 수출에 있다는 말들을 자주 한다. 국내 내수시장 규모로는 현재의 국민총생산량을 소비할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갑이 A라는 물건을 만들어 파는데, 동네에 A가 필요한 사람이 5명 밖에 없더라는 거다. 그러면 해법은 두가지가 있다. 5개를 만들어서 5개만 파는 방법이 그 하나다. 다른 한 가지는, 굳이 10개 판 돈을 벌어야겠다면, 옆동네에서 A가 필요한 사람을 5명 더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갑이 물건 10개를 팔아서 번 돈으로 같은 동네 사람들이 만든 다른 물건을 사서 쓸 경우, 결국 그 동네는 A 5개 만큼의 경제적 부를 축적한다는 이야기다. 즉,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한다면--내수시장이 엄청나게 낭비를 하지 않는 한--수출을 해야만 한다.

좁아터진 내수시장의 결정적인 문제는 그 시장 내의 소비자에게서 선택의 여지를 박탈해간다는 거다. 뭔 말인고 하니, 동일한 아이템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생산자가 n명이 있다면, 각 생산자에게 시장의 규모는 평균적으로 총시장의 1/n로 줄어든다는 이야기다. 이때 n이 꽤 크다면 시장의 규모가 너무 협소해서, 생산비가 많이 드는 생산자는 경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다.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생산자의 수는 내수시장의 규모에 비례하게--꼭 정비례는 아니더라도 양의 상관관계를 갖게--마련이고, 작은 시장 내부의 소비자는 소수의 생산자들에게서 제공되는 제품들 중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민국 문화산업의 비극이 숨어있다. 사실 텔레비전, 전화기, 냉장고,  세탁기, 심지어는 옷이나 집 까지도 남들이랑 다 똑같은 걸 사용하더라도 삶이 근본적으로 빈곤해지진 않는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TV 프로그램, 영화를 보고, 똑같은 책을 읽고, 똑같은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시장 경제체제하에서 이런 컨텐트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애초에 이런 것들이 많은 소비자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본은 컨텐트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거다. 자본의 유일한 고민은 더 큰 자본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다. A가 잘 팔리면 A만 만들면 그뿐이지, A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B까지 만들어줄 이유 따위는 없다. 이런 체제는 다수의 취향과 다른 취향을 지닌 사람들이 소비할 문화를 남겨주지 않고, 결국 시간이 지나다보면 취향이 다른 소수자들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반강제적으로 같은 문화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취향을 닮아갈 것이다. 자본은 기본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으로 표현되는 양성 피드백을 통해서 몸집을 불려나간다.

경쟁적 자본주의를 숭배하기는 미국이 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못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 결과로 미국도 최근에는 대중의 입맛에 맞는 reality tv show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가지 차이라면, 미국은 절대 다수의 입맛에 맞지 않는 문화라 할지라도 이를 생산해내고 이를 소화할 수 있는 시장의 규모가 있다는 거다. 그래서 다양한 문화 중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을 선택할 여지가 있고, 이때 자신과 취향이 동일한 소수자들끼리 연대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세력화를 통해 꾸준히 자신들이 즐기는 문화를 누군가는 생산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거다. 시장의 규모란 소비자의 머릿수로 결정될 뿐, 전체 시장 규모에 대한 비율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전체 국민의 극히 일부만이 소비할 뿐이라 할지라도 이를 생산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 시장의 규모가 없는 한국에서 문화적 다양성이 자리잡을 여지란 쥐똥만큼도 없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선 말이다.

@ 대한민국이 얼마나 소름끼치게 획일적이냐면, 이런 얘기만 해도 빨갱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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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논리적 오류 중 하나는 명제와 그 역명제의 참/거짓 관계를 혼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1) 고래는 포유동물이다. 2) 포유동물은 고래이다. 1)과 2)는 상호 역명제 관계에 있는 명제들로 1)은 참, 2)는 거짓이다. 비교적 간단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떤 명제가 참이라고 해서 그 역명제가 반드시 참은 아니라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상호 역명제 관계의 두 명제는 동일한 선언문이 아니다.

그러면 '3) 포유동물이 아니면 고래가 아니다'와 '4) 고래가 아니면 포유동물이 아니다'라는 명제들을 생각해보자. 3)과 4) 역시 상호 역명제로 3)은 참, 4)는 거짓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1)과 3)은 상호 대우명제고 2)와 4)는 상호 대우명제로, 어떤 명제가 참이면 그 대우명제는 반드시 참이고, 어떤 명제가 거짓이면 그 대우명제는 반드시 거짓이다. 다시 말해 대우관계에 있는 두 명제는 반드시 동일한 선언문이다.

자, 그러면 다음의 명제들을 또 살펴보자. 5) 우유를 많이 마신 사람은 키가 크다. 6) 키가 큰 사람은 우유를 많이 마신다. 이거, 얼핏 보면 그게 그 이야기 같다. 그러나 5)와 6)은 서로 역관계이지 대우관계가 아니다. 따라서 둘 중 어느 하나가 참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하나가 반드시 참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2006.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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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는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이 있어서 과학고를 나오고 과기대도 나온, '과학자의 커뮤니티' 속에 파묻혀 있을줄만 알았던 내 주변에도 이제 과학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얼마 안 남았다. 그런 상황이 실망스럽다거나, 나만 남겨두고 떠나간 당신들이 원망스럽고 밉다는 정신나간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현실주의자가 이상주의자에게 냉소를 보내고, 이상주의자가 현실주의자를 비난하는 일이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지만, 쉽다고 손바닥만 뒤집고 앉아 있어봐라, 뭐가 남나. 다들 어린 마음에 속은 걸 어쩌겠는가. 나도 가끔은, 이 우중충한 지하 실험실에 내 청춘을 다 바치다가 어느날 정신을 차리고 고개 들어 세상을 둘러보니 남은 건 처자식에 빚더미일 암울한 미래에 대한 회의가 안 드는 거 아닌데...

그래도 내가 아직도 과학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은, 첫번째로는 나는 아직도 과학이 좋다. 과학이 지닌 논리의 정갈함, 1+1이 2인데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좋다. 목소리 큰놈이 하자는대로 하는 게 아니란 그 사실... 요새는 1+1이 2가 아닐 때도 있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1+1이 2가 아니라면, 그때에도 역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모두가 납득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 생각해보란 말이다. 과학하는 사람들 중에야 여느 바닥이나 마찬가지로 거짓말쟁이들이 널렸지만, 과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둘째 이유는, 오히려 남들이 다 떠나가니까 떠나기 싫어진다. 왠지 남들 하는 거 하기 싫고, 남들 안 하는 거 하고 싶어하는 어설픈 반항아라 어쩔 수 없다. (사춘기 소년도 아닌 것이... -_-,,) 마지막으로는, 대학원 와서 5년이 넘도록 논문 딸랑 두편 내놓은 별 볼일 없는 대학원생이지만, 나만이 이 바닥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이 꼭 있을 거라는 자존심, 그거 아직 버릴 수 없다.

사실 과학, 특히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축소되고, 과학자들에 대한 대접이 소홀해지는 건 꼭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국가나 기업 경영자들의 경영원리에 좌지우지되는 까닭이겠지만, 그 이면에 숨은 이유가 있다고 보는데, 바로 인간 진화의 속도가 정보와 지식의 생산 속도에 따라 잡혔기 때문이다. 과학이란 게 사이비 종교 교리가 아니다보니 무에서 유가 창출이 안 된다. 결국 '새로운 발견'하나를 위해 지금까지의 발견을 습득해야하는데, 사람 머리가 아주 빠른 속도로 비상해지는 일이 없다보니, 시간이 갈수록 학습에 투자해야하는 시간은 늘어나는 거다. 그렇다고 수명이 갑자기 늘어나는 일도 없기 때문에 '새롭고 놀라운 발견'의 속도가 계속해서 더뎌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진짜 솥빠지게 공부하는데도, 과학자들이 하는 일 없이 놀고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 와버리고 말았다. 한사람의 과학도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과학자들 대접이 갈수록 박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과학자를 푸대접하는 상황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이공계의 위기'가 '국가의 위기'가 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잣대를 적용했을 때 다다를 수 있는 하나의 결론일 뿐이기 때문이다. 밥을 굶어 생존이 위협될 정도의 빈곤에 시달릴 때에는 삶의 질을 가늠할 척도는 먹고 사느냐 굶어 죽느냐로 획일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밥을 굶지 않을 정도의 경제적 안정성이 확보된 이후에는ㅡ현실적으로는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경제성장을 통한 물질문명의 확대라는 획일적인 잣대가 압도적인 주류를 이루고 있다마는 원칙적으로는ㅡ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잣대를 가질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보다 자동차를 타는 것이, 촛불을 켜고 사는 것보다 형광등을 켜고 사는 것이 더 편리한 삶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게 반드시 더 나은 삶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문명이 제공하는 모든 혜택을 누리고 사는 내 삶이, 산속에서 수양하며 깨달음을 향해가는 이름 모를 그 누군가의 삶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의 기준은 마음먹기에 달린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니까, 과학자들 대접을 잘해줘야 된다는 이야기는 사실 다 호랑이가 풀 뜯어먹는 소리다. 극단적으로 말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호버크래프트가 자동차를 대체한들 그게 풍욘가? 뭐, 타이어 마모에서 나오는 분진 감소로 환경이 깨끗해질라나? 그건 확실히 좋은 일이긴 하겠군. --a 아무튼 과학자들 푸대접받는 게 못마땅하다는 건, 거리의 청소부가 푸대접받는 게 못마땅하다고 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다. (청소부를 예를 들어 청소부들한테는 조금 미안하군.) 왜냐하면 '과학의 중요성'이란 건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정의가 달라지는 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이공계 위기는 산업혁명 이후 사회구조의 위기이고, 자본주의의 위기이며 물질문명의 위기이지, 이공계의 위기가 아니며, 국가의 위기나 인간 삶의 위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게 단 몇명일뿐일지라도, 사람들이 과학이 재미있어서 과학을 하는 한, 이공계 위기에 이공계 위기는 없다.

그런데 진짜 문제가 뭐냐면, 국가와 기업 경영자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거다. 과학에 투자할 마음이 없다면 그거 탓할 마음은 없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과학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사람 사는 세계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일부다. 그걸 인정 안 해주면서, 과학이 중요한 거니까 과학자들 대접해달란 이야기, 낯짝 뜨겁게 어떻게 하냐? 그런데 경영자란 놈들이, 과학이 중요하네, 이공계생들의 처우 개선을 해야하네 따위의 말을 떠들면서 어설프게 사람들 현혹해서 열심히 쓰다 버리는 거, 이게 문제다. 곧 노벨상도 나올 거라는 개구리가 뱀 잡아먹는 소리로 바람 열심히 잡다가, 우리가 선진국에 몇십년 뒤졌다며 빨랑 쫓아가야된다고 쥐잡듯이 다그치는 정신 나간 놈들, 이게 문제다. 실험 장비 살 돈이라곤 땡전 한푼 안 주면서, 과학자들보고 왜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냐고 다그치기만 하면, 팥으로 메주가 쒀지냐?

우린 남는 게 빚더미 뿐이더라도 별로 바라는 것 없이, 왜 1+1이 2인지 신기해하면서 우리끼리 재밌게 잘 살 수 있으니까, 우리한테 해주는 것도 없이 바라지 말라는 말, 과학을 과학하는 사람들에게 넘겨달란 말, 그게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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