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오는 게 확정된 후로 엄마가 일본어 학원을 한달이라도 다니라고 수차례 권하셨지만, 뭐, 물리학자가 아니었더라면 엄마말 안 듣는 게 내 직업일 뻔한 인간 아닌가. 3년전 교토에 갔을 때의 어렴풋한 기억에 의존해 '일본에서 일본어, 하면 생활이 무지하게 편리하겠지만, 못해도 못살진 않는다'고 판단, 일본에 오기 위해 딱 한가지만 준비했다. 바로 나리타 공항에서 와코까지 가는 교통편과 와코시에 도착해서 리켄(이화학연구소)를 찾아가기 위해 리켄 캠퍼스 지도를 인쇄한 것.
리켄 홈페이지에 가면 일어와 영어로 된 버전이 각각 있어서, A4 용지 양면에 영어-일어본을 각각 인쇄해두고는 마음 든든해하고 있었다. 전철역에는 영어 안내가 대충은 있을 거라 판단했고, 와코에 도착해서는 택시 타고, 리켄 캠퍼스 지도를 펼쳐 보이고 캠퍼스 내에 가야할 지점을 손으로 찍으면 될 테니까... ㅋㅋㅋ
뭐, 완벽하진 않지만 나름 훌륭한 계획일 뻔했다. 그렇지만 블로그를 살찌우는 건 삽질이라고, 웬걸, 공항에서 보안 검색 통과하려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는데, '어라? 인쇄해둔 지도가 가방 안에 안 보이네?' 그렇다, 인쇄만 해두고 집에 놔두고 왔다. -_-,, 이제와서 어쩌겠어? 그것 때문에 비행기 안 타고 대전 갈 건 아니잖아.
그리하여 와코는 和光 이렇게 쓴다는 것만 달랑 알고 일본으로 출발. 나리타에 도착해서 와코시로 떠나기 전에 모든 걸 해결하리라. 무슨 이야기냐면, 보통 공항 안내 데스크에는 자국어 외에 외국어로 안내 가능한 사람이 있잖아. 영어는 물론 운 좋으면 한국어를 조금 하는 안내원이 있을 테니까, 거기 가서 와코시 가는 방법은 물론, 와코에 도착해서 택시 기사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일본어로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면 되는 거야!
그렇지만 신이 plan A를 엿먹였을 땐--너가 삽질한 거지 신이 엿먹인 거냐?--plan B도 엿먹일 것쯤은 계획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왜 안 하는 거냐? 너가 좀 허술하기로서니 전지전능하신 냥반도 그럴 거라 생각하면 안 된다고...
일본에 도착해서 입국심사를 하는데 전조가 좋지 않다. 무슨 일로 왔길래 무비자 입국으로 체류 가능한 90일을 꽉꽉 채울 계획인 거냐고 묻길래 'I'm visiting Riken Institute.'라고 했더니
- Riken?
= Yes, Riken.
- What is Riken?
= It is a research institute.
- Riken?
= Yes, Riken in Wako.
- I don't know Riken.
이러고 앉았다. 이런 닝기리. -_-,, 결국 컴퓨터를 꺼내들고 다운받아뒀던 리켄 지도를 보여주자,
- Ah, 리켄. Of course, I know 리켄.
나에 대해 깨달은 것 하나. 일본어는 못해도 일본어 발음이나 억양을 대충 흉내는 낼 수 있다. 필요하면 일본어 비슷한 소리들만 줄줄이 엮어서 시불거릴 수도 있다. 일본어 하는 사람이 들으면 물론 "^%$#^%^* %@#$@ &%*^ @$!%$&$% ^#&%$$&" 이렇게 들리겠지만,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일본어하고 있을 거라 생각할 정도로... 그런데 영어를 하는 도중에 일본어 단어를 섞으면 영어권 사람이 일본어를 말하는 듯한 발음과 억양을 그대로 따라간다. 리켄이라고 하는 대신에 뤼켄 비슷한 소리가 튀어나오고, '코'에 강세를 줘서 와
코라고 하는 대신 Wacko를 읽듯이
와(와와 왜 사이의 어중간한 바름)코라고 말한다는 이야기. -_-,,
암튼 리켄에 간다니까 OK, 90일짜리 입국허가 내주더군. 사실 컴퓨터 켜드는 건 최후의 필살기였는데--배터리가 맛이 가서 전원 없으면 한 7분쯤 밖에 못 버틴다--그걸 그나마 영어로 의사 소통이 가능한 입국 심사대에서 써먹게 될 줄이야, 크헉.
암튼 일본 입성, 이젠 2월달에 비행기 타고 한국 가기 전까진 어떻게든 여기서 버티는 거야. 그리하여 짐을 찾아서 자동문(이 있었던가? -_-a) 열리면 사람들 마중 나올라고 기다리는 곳으로 가서는 안내 데스크를 두리번 거리고 찾았다. 두 사람이 지키고 있는데 두 사람 중 한 사람 앞에만 English라는 사인이 붙어 있네, 어라, 예감이 또 안 좋다. 데스크 앞에 가서 "Do you speak English or Korean?"이라고 했더니 "Only very little English." 'Only very little'이라니, 안돼~~~!!! 와코시 어떻게 가냐고 물었더니 영어로 된 지하철 지도를 펼쳐 보여주면서 굉장히 처절한 느낌의 영어를 구사하며 형광펜으로 갈아타는 역을 대충 표시해주는 거다. 택시 기사에게 할 말을 일본어로 알려달라거나 적어달라고 하는 건 포기.
암튼 나리타에서 이케부쿠로까지 (중간에 기차를 한번 갈아타고) 간 후에, 거기서 기차 표를 새로 사서 와코까지 가면 된다는 건 알았다. 가보지, 뭐. 그런데 도쿄가 교토에 비해 외국인이 전철을 이용하기엔 조건이 조금 더 불리했다. 내 기억에 교토는 전철역마다 직원들이 있어서 목적지 알려주고 손짓발짓하면 표사고 기차타는 걸 도와줬고, 기계에서도 목적지를 입력해서 표를 살 수 있었는데, 어라 이케부쿠로에 도착하니 표사는 기계만 있고 사람은 전혀 안 보이네. 일단 English 버튼은 있어서 눌렀지, 뭐. 그런데 금액에 맞춰 표를 살 수 있게 돼 있는데, 어디까지 가는데 얼만지는 전혀 표시가 안 돼 있다. 근처에 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이봐, 나 같은 사람은 어쩌라고... ㅠ.ㅜ (그래, 안다. 나 같은 사람은 존재하면 안 된다는 거... 3개월이나 가 있을 거면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의 언어를 익히고, 그게 안 되면 최소한 여행 책자를 읽어보거나, 인터넷의 수많은 여행기를 살펴 보면서 그 동네 시스템이 어떻게 돼 있나는 확인해보는 게 최소한 방문국에 대한 예의지.)
그래도 다행히 Emergency Service던가 뭐, 그 비슷한 버튼이 하나 있길래 그냥 눌렀다. 유니폼 입은 직원이 허겁지겁 뛰어오더군. 기계를 가리키면서 "How does this work?"라고 했더니 "이건 또 어느 별에서 온 생명첸가?"하는 표정과 "나 영어 못하는데"라며 긴장한 듯한 표정이 뒤섞인 얼굴로 날 쳐다본다. 그래, 괜히 뛰어왔네 싶겠지. 어쩌겠어. 나에 대해 깨달은 것 둘, 나는 바디 랭귀지를 진짜 조또 못한다. -_-,, 일본에 왔다고 '조금'이란 의미로 조또를 사용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여기서 조또는 조낸, 졸라, 존나 등과 치환 가능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교토에서도 손짓발짓 다했던 건 내가 아니라 동행했던 미국인들이었던 거 같다. 나는 바디 랭귀지를 하기엔 너무 쿨해서 애들이 생쑈하는 걸 뒷짐지고 지켜보며 키득거리고만 있었던 게야.
그럴 땐 무조건 "와코!"를 외치면서 기계를 가리켜야 되는 건데, 천엔짜리 한장 들고 기계만 가리키고 있으니, 그 불쌍한 냥반 꽤나 답답했을 거야. 그걸 지켜보던 옆의 한 젊은 총각이 그 직원 아저씨한테 일본어로 뭐라뭐라 말하니까 아저씨가 "Where?"라고 묻는 거다. 그제서야 나의 삽질을 깨달은 나는 "와코!"를 외칠 수 있었다. -_-,,
그 아저씨 표를 끊어주고는 내가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하자마자 사라졌다. 그리하야 나는 유유히--라고 하기엔 사실 짐이 너무 많았다. 세달간 생활할 짐 + 실험 장비를 끌고 댕기고 있었단 말이다--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할라고 표를 띡 집어넣는데 개찰구 문이 덜컹 닫히네. 에엑? 개찰구 이것저것 수차례 시도해봤는데, 이놈이 도저히 나를 통과시켜줄 생각을 안 하는 거다. 설마 이 아저씨, 내가 일본어 못한다고 나 물맥인겨? -_-,,
그리하야 이케부쿠로의 수많은 인파들 속에서 영어가 가능할 것 같은 사람 찾아내기 게임이 시작됐다. 모범 고등학생 정도가 딱 좋을 것 같은데 눈에 띄는 고등학생들은 어째 죄다 날라리 같다. 하긴 모범생은 그 시간에 이케부쿠로의 밤거리를 쏘다니지 않고 공부하고 있었겠지. -_-,, 다음 타겟은 젊은 층의 커리어맨이나 커리어우먼... 이런 부류의 사람은 꽤 많은데, 정작 'excuse me'라면서 말이라도 걸라치면 눈도 안 마주치는 건 물론 발걸음이 더 빨라져서 휘익 도망가버린다. 축지법이라도 쓰나 이 냥반들이... 몇차례 시도하다가 '아, 이건 씨도 안 먹히는구나' 싶어서 서있는 사람으로 타겟 교체. 걸어가던 사람은 못 들은 척--이라고 하기엔 걸음걸이가 티나게 빨라지잖아, 이 사람들아!--계속 걸어가겠지만, 누군가/뭔가를 기다리느라 서 있는 사람들은 도망갈 핑계거리가 조금 없으니까... 그런데 서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보니 그냥 눈에 띄는 총각 하나 찍어서 'excuse me'라고 하자 급당황하는 기색 역력. 잠지만 주춤하면, 도망이라도 갈 기세. 영어는 전혀 못하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일본 도착 첫날부터 노숙하느냐 마느냐의 기론데, 그냥 불쑥 쥐고 있던 표를 보여주며, "와코!"라고 외쳤다. 표를 보더니 Tobu line이라고 가르쳐준다. 그렇다, 이케부쿠로에서 와코로 가는 전철은 지하철이 두 노선, Tobu line이라고 하는 지상철이 한 노선 있는데, 나는 Tobu line 표를 들고, 지하철 개찰구로 들어가려고 허우적대고 있었던 거다.
암튼 그래서 와코까지 가는데 와코 도착해서 택시 탈 일이 막막하다. 리켄 서문까지 가서 그곳 경비에게 맡겨둔 내가 묵을 숙소 열쇠를 받은 후, 숙소까지 다시 가야 하는데 서문이 일어로 뭐지? '정 안 되면 西門이라고 글씨를 써줘야지, 뭐'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반전 또 하나, 뚜시쿵! 펜이 없다. -_-,, '아무리 컴퓨터로 뭐든지 다하는 세상이 됐다지만, 그래도 직업이 '공부'인데, 세달간 어딜 가면서 펜하나 안 들고 가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나의 프로페셔날리즘 부족에 대한 고민은 조금 있다 해도 늦지 않고, 일단 리켄 서문까지는 가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게 예~엣날에 아빠가 동경대 정문이 유명하다면서 일본어로 아까문(빨간문이란 뜻이라는데)인가 아끼문인가 그랬던 기억이 났다. 문은 일본어로도 문인지 몬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대충 뭉그러뜨려 발음하면 되고 '서'가 뭔지만 알면 된다. 그런데 다행히도 전철을 타고 오는 도중에 '니시니뽀로'라는 역을 지나쳤었는데, 밑에 한자로 '西日어쩌고'라고 써있었다. 서문? 니시문? 뭔가 그럴 듯...한가? 모르겠다, 어차피 이제와서 다른 방법은 없잖아.
와코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는 '리켄 니시문'이라고 말하자 기사가 '리켄 니시문➚?'이 아니라 '리켄 니시문➘!'이라면서 출발하는 거다. 그래 됐어. ㅠ.ㅜ 물론 와코에 '리켄니 시문'이란 곳이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내가 그 정도로 운 나쁜 인간은 아니라고... s(-_-)z 아무튼 지도/길 아내 인쇄해둔 거 두장 안 챙겨들고 왔다가 대형 트렁크 두개, 캐리온 가방 하나, 랩탑 가방 하나 들고 파김치가 된 하루는 다행히도 노숙으로 끝나진 않았다. 그리고 숙소에서는 물론 이 구절이 나를 반겨줬다.
일본에서 영어만 하고 살긴 힘들쿤화~ ㅠ.ㅜ
@ 무용담(?)이라기엔 너무 약하다고? '기차 잘못 타고 동경 반대 끝을 한번 찍었다거나, 결국은 노숙하며 하루가 끝나고 to be continued 쯤은 찍어줘야지...'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온실에서 자란 화초라고, 나에겐 이 정도도 벅차, 버럭! ㅡㅠㅡ

(
0)

(
0)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