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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29 지식과 신자유주의 (3)
  2. 2008/04/12 문화의 빈곤이 주는 피로 (1)
얼마전 MB가 '취업 안 되는 젊은이들 기술 교육 시키자'는 발언을 했는데, 이에 대한 이택광님의 반응은 조금 과민반응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이 발언과 이 해석이 실험이 좀 딜딜 말리는 타이밍에 나와버리니 꽤나 의미심장하다. 내가 하는 일이란 게, 정말 딱 인문학만큼 경제적 가치 창출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하는데, 비용은 그에 비해 천문학적으로 많이 드니 사실 경제적으로 쓸모없기로 말하자면 내가 인문학자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다.

사실 어디가서 물리학한다고 나에 대해 소개하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떤 걸 연구하냐?'는 질문에 가차없이 따라 오는 게 '그래서 그걸 어디에 쓰냐?'는 질문이다. 그럴 때면 정말 과학과 기술이 동치인 시대를 살고 있구나란 실감이 난다. 나는 물론 꽤나 자랑스럽게 '써먹을 데 없다'고 대답하지만, 대부분 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거나, 대답하기 귀찮아한다고 생각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어딘가엔 사용할 수 있으니 연구할 거 아녜요'라며 집요하게 캐묻는다.

물론 이에 대한 모범답안이 몇가지 있긴 하다. '지금은 뭐에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아직 모르는 걸 더 많이 알고 있는 후세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기술일 수 있다'거나 '그저 인간의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순수한 호기심의 발로다' 따위가 그거다. 이런 수사들을 누가 언제 처음으로 읊조렸는지는 알 수 없다만, 그 최초의 누군가는 그 당시에 이런 수사들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었거나, 나름 섹시해 보였을 수도... 그렇지만 요샌 사실 좀 진부하다. 가끔은 나조차 믿지 않으면서도, 더 좋은 답이 없어서 아무생각 없이 내뱉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더 나은 답이 없다는 거, 그보다는 더 나은 답이 없을까 별로 고민해보지 않는다는 거,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다.

사실 교육기관과 학문의 발전 과정을 보면, 근대 과학의 시초가 된 대부분의 아이디어들은 근대 이전의 봉건제시절에 탄생했는데, 당시 교육의 기회라는 건 대부분 노동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지배계급에게 한정돼 있었다.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이 분명한 봉건제도 하에서 노동계급은 노동하는 동안 지배계급은 남는 시간 동안 만물의 근원에 대해 고민하거나,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을 품는 것을 노동계급에게 정당화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과학이든 철학이든, 혹은 예술이든 '나한텐 재미있으니까'라는 순수한 관심 이외의 그 어떤 목적을 갖지 않아도 됐다.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단 하나의 잣대로 세상사를 가늠하는 천민자본주의가 인문학이나 순수 과학, 혹은 인간성을 죽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사실 이들을 죽이는 건 자본에 힘을 실어준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개념 위에서 출발한 민주주의일 거다. 무슨 이야기냐면 '만인이 평등하다'는 자유민주주의 하에서 과학과 인문학의 당위성은 봉건제 하에서의 그것과 완전히 달라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만인이 평등하다면 특정 집단의 노동의 결과를 다른 집단이 정당한 댓가없이 취할 수 없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노동하는 동안, 나는 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에 일년 365일을 다 사용하느라 노동을 하지 않았/못했다면, 누가 잘못한 걸까?

물론 오늘날 소위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지식의 생산은 노동이다. 대부분의 과학자, 인문학자, 예술가에게 물어도 자신이 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다. 농부가 1년 내내 땅을 일궈 쌀을 생산하듯, 책, 실험기구, 악기 등과 매일 씨름하며 인간의 지식의 지평을 넓히고 새로운 예술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고 할 거다. 그렇지만 문제는 "누구를 위해서?"인가 이다.

이건 자본주의가 지식과 진리, 문화를 상품화하거나 돈거래로 만드는 것과는 관계 없는 문제다. 내가 A만 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서 B를 생산하여 '먹고 살기'위해서는, 누군가는 내게 B의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즉, 나는 A의 결과물 B를 누군가에게는 자본 혹은 B가 아닌 다른 어떤 재화와의 교환 가치가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야 가능한 거다. 여기서 B가 무엇이냐, 그리고 댓가를 지불하는 그 누군가가 누구냐는 전혀 상관없다. 지식/문화 생산을 취미활동이 아닌 직업으로 만드는 순간, 지식/문화의 상품화는 일어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는 그 가격을 누가 어떻게 매기느냐의 차이일 뿐...

이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이 평등하긴 한데, 누군가의 노동의 결과는 당연히 상품화되는 거고, 누군가의 노동의 결과는 상품화하기에는 너무나 고귀하다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실제 문제는 지식의 상품화가 아니라, 지식의 가치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본주의에서 시장이 지식의 교환 가치를 너무 싸게 매겨 버린 거다. 그런 현실에서 이공계/인문학 기피와 맞물린 한/치/의/법/경영대로의 급속한 인력 이탈 현상은 놀랄 일이 아니다. 

과학하는 사람들이 '과학은 중요하다', 인문학하는 사람들이 '인문학은 중요하다'고 믿는 건 당연하다. 과학이 혹은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과학을 하고 인문학을 하고 있는 거잖은가? 그런데 시장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결국 정부의 역할은 때로는 시장의 횡포 때로는 시장의 삽질을 바로 잡는 건데, 어라, 정부는 꼼짝도 않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게 빠졌는데, 정부가 이 중개자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정부는 시장과는 다른 가치 판단의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의 철학과 정책, 매스미디어의 포지셔닝 등이 모두 나름의 역할이 있는 건 맞다. 그렇지만 이런 가치 판단의 기준은 어디선가 저절로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흥미로워하는 것을 남들이 흥미로워하지 않을 때, 그게 흥미로운 일이란 걸 납득시킬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다. 그럼에도 정작 학계에서 과학을, 인문학을 살리라고 하면서 정작 뱉어내는 수사들은 '음식이 육체를 살찌운다면, 문화는 정신을 살찌운다', '돈이 행복을 살 수는 없다' 따위 뿐이라면--이런 주장들이 왜 참인지를 효과적으로 납득시킬 능력이 없다면--딱,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거다'라고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자고 주장하는 것만큼의 설득력을 가질 뿐이다.

노동계급이 사회 대부분의 부를 생산함에도, 정작 그 부의 대부분을 누리는 게 소수의 지배계급인 사회 구조에서, 지배계급이 지식과 문화의 대부분을 생산하고 동시에 이를 누리는 건 당연하다. 오늘날의 과학자, 인문학자, 예술가들이 그 당시의 지배계급이 향유했던 그 특권을 부러워하는 것 역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에 대한 낭만에 사로잡혀 자본주의와 정부의 어리석음을 향해 손가락질한다면, 이는 집단 이기주의에 기반하여 내게도 그 당시 그들이 누렸던 '특권'을 달라는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쌀 농사꾼이 고객을 상대로 빵 대신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그럴 듯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하듯, 우리는 핸드백 하나를 사는 것보다 책 10권을 읽는 게 더 좋은 이유, 혹은 아이폰 같은 신제품 하나 더 개발하는 것보다 초유체의 신비를 규명하는 게 더 좋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단순히 '책 10권 안에는 새 핸드백 하나로는 누릴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라면 '나는 새 핸드백 하나 사는 게 책 10권 읽는 것보다 좋던데?'라고 되돌아오는 한마디만큼이나 허탈하잖은가.

내가 생산하는 지식과 문화를 단순히 돈으로 교환하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그 진정한 가치에 대해 세상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한 자본주의가 세상을 망친 게 아니라, 내가 생산하는 지식/문화는 천박한 자본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고귀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에 눈이 멀어서, 그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한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지식인들이 자기 무덤만 파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거다. 원래가--인류의 지식/문화는 돈으로 매길 수 없다는 믿음처럼--나한테는 너무도 당연한 게, 남들한테는 완전 딴 세상 이야기이게 마련이다.

@ 언제나처럼 답은 없이 문제제기만...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난 내가 하는 일에 왜 국민의 혈세를 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포기한지 오래. 그냥 나는 이거 하고 싶은데, 국가가 (국민들을 대표해서) 이 일에 돈 들이겠다면 땡큐고, 싫다면 그게 정상이지 싶음... -_-a 진리를 밝혀내기 위한 인간의 무한한 호기심이란 따지고 보면 무한한 호기심이 있는 인간들도 더러는 있다는 얘길 아전인수식으로 비틀어 버린 것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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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있을 땐 TV를 참 열심히 봤다. 요새 국내에도 미드가 많이 소개되는데 참 볼만한 것들이 많았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Deadwood, The Wire, Firefly 같은 프로그램에서부터 국내에도 꽤 많은 팬을 확보한 House, Dexter 까지. 거기다 시사 코메디쇼인 Jon Stewart Daily Show나 Colbert Report도 거의 매일 꼬박꼬박 챙겨봤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끄는 24(처음 세시즌은 열심히 봤다), Lost, Prison Break 등은 그다지 재미있는 줄 모르겠다.

확실히 내 취향은 한국인의 대중적 취향과는 빗나가는 것 같다. 미국에 있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아쉬운 부분 중 하나는 볼만한 TV 프로그램이 정말 없다는 거다. 요새 열심히 챙겨보는 TV 프로는 끽해야 100분 토론이다. 특히 정치 이야기가 나올 때면, 딴나라당의 딴소리에 혈압 오르는 재미가 너무 쏠쏠해서 도저히 못 끊겠다, 이건. ㅡㅠㅡ 그 외에는 채널들 돌려봐야 뭐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는 그나물에 그밥 버라이어티쇼들만 넘쳐난다. 근데 이게 뭐 그냥 사람들 여럿이 앉아서 잡담만 한다. 버라이어티쇼에 버라이어티가 없다. orz TV를 보는 일이 피로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한국은 내수시장 규모가 작기 때문에 한국 경제의 활로는 수출에 있다는 말들을 자주 한다. 국내 내수시장 규모로는 현재의 국민총생산량을 소비할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갑이 A라는 물건을 만들어 파는데, 동네에 A가 필요한 사람이 5명 밖에 없더라는 거다. 그러면 해법은 두가지가 있다. 5개를 만들어서 5개만 파는 방법이 그 하나다. 다른 한 가지는, 굳이 10개 판 돈을 벌어야겠다면, 옆동네에서 A가 필요한 사람을 5명 더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갑이 물건 10개를 팔아서 번 돈으로 같은 동네 사람들이 만든 다른 물건을 사서 쓸 경우, 결국 그 동네는 A 5개 만큼의 경제적 부를 축적한다는 이야기다. 즉,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한다면--내수시장이 엄청나게 낭비를 하지 않는 한--수출을 해야만 한다.

좁아터진 내수시장의 결정적인 문제는 그 시장 내의 소비자에게서 선택의 여지를 박탈해간다는 거다. 뭔 말인고 하니, 동일한 아이템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생산자가 n명이 있다면, 각 생산자에게 시장의 규모는 평균적으로 총시장의 1/n로 줄어든다는 이야기다. 이때 n이 꽤 크다면 시장의 규모가 너무 협소해서, 생산비가 많이 드는 생산자는 경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다.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생산자의 수는 내수시장의 규모에 비례하게--꼭 정비례는 아니더라도 양의 상관관계를 갖게--마련이고, 작은 시장 내부의 소비자는 소수의 생산자들에게서 제공되는 제품들 중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민국 문화산업의 비극이 숨어있다. 사실 텔레비전, 전화기, 냉장고,  세탁기, 심지어는 옷이나 집 까지도 남들이랑 다 똑같은 걸 사용하더라도 삶이 근본적으로 빈곤해지진 않는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TV 프로그램, 영화를 보고, 똑같은 책을 읽고, 똑같은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시장 경제체제하에서 이런 컨텐트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애초에 이런 것들이 많은 소비자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본은 컨텐트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거다. 자본의 유일한 고민은 더 큰 자본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다. A가 잘 팔리면 A만 만들면 그뿐이지, A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B까지 만들어줄 이유 따위는 없다. 이런 체제는 다수의 취향과 다른 취향을 지닌 사람들이 소비할 문화를 남겨주지 않고, 결국 시간이 지나다보면 취향이 다른 소수자들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반강제적으로 같은 문화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취향을 닮아갈 것이다. 자본은 기본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으로 표현되는 양성 피드백을 통해서 몸집을 불려나간다.

경쟁적 자본주의를 숭배하기는 미국이 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못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 결과로 미국도 최근에는 대중의 입맛에 맞는 reality tv show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가지 차이라면, 미국은 절대 다수의 입맛에 맞지 않는 문화라 할지라도 이를 생산해내고 이를 소화할 수 있는 시장의 규모가 있다는 거다. 그래서 다양한 문화 중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을 선택할 여지가 있고, 이때 자신과 취향이 동일한 소수자들끼리 연대가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세력화를 통해 꾸준히 자신들이 즐기는 문화를 누군가는 생산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거다. 시장의 규모란 소비자의 머릿수로 결정될 뿐, 전체 시장 규모에 대한 비율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전체 국민의 극히 일부만이 소비할 뿐이라 할지라도 이를 생산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 시장의 규모가 없는 한국에서 문화적 다양성이 자리잡을 여지란 쥐똥만큼도 없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선 말이다.

@ 대한민국이 얼마나 소름끼치게 획일적이냐면, 이런 얘기만 해도 빨갱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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