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님의 강남이 왜 욕을 먹느냐구? 구한말 사대부를 보라에서 다시 한번 트랙백. 지난번 글에 은하님이 다신 댓글에 다시 댓글을 다는 과정에서 생각을 다시 정리하느라고 쓴 글.
교육감 선거 결과에 대한 논쟁이 부동산 문제로 옮아갔다. 강남의 계급성에 대한 내부자와 외부자간의 시각 차이랄까... '갖고 있던 집값이 올랐을 뿐인데 무조건 부자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알고 보면 우리도 서민'이라는 내부적 인식과 '몇천만원짜리 전세도 못 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무슨 배부른 소리냐'는 외부적 인식의 충돌에서 그 어느쪽도 개인적인 경험의 한계를 극복할 생각이 없다면 접점은 별로 없어 보인다.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나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목적이라면, 무조건 힘을 길러서 피아를 갈라 끝없이 싸우다보면 힘센 놈이 이기게 돼 있다. 그런데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면 설령 나의 문제는 해결되더라도 피해자는 언제 어디서나 남아있다는 숙제가 남는다. 물론 그건 싸움에서 이긴 나의 숙제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방이 나한테 다시 덤벼들기 전까지만이다. 상대방이 싸움을 걸어오면, 나는 좋든 싫든 또 싸움에 휘말려 들게 마련.
결국 나의 문제가 사회 전체에서 어떤 맥락을 갖는가에 대해 거시적으로 접근함으로써, 나의 문제를 유발시키는 보다 커다란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인 나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게 현명하단 이야기.
자, 종부세 논란을 살펴보자. '세금 낼 돈이 없어서 이사 가라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질문을 생각해보자. "우리 집을 강제 철거하기 때문에 이사 가라는 건 말이 되는가?" 종부세든 지역개발이든 우리가 속한 사회(종부세나 지역개발만 놓고 이야기를 하자면, 보다 구체적으로는 국가라는 조직이)가 사회 전체의 이익이란 이름으로 행하는 제도적 장치다. 그 제도적 장치의 합리성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지역개발을 빌미로 하는 내집 강제 철거는 불합리하지만 종부세는 합리적이다'라고 판단하는 계층이 있는가하면 '전자는 합리적이지만 종부세는 불합리하다'라고 판단하는 계층이 있는 것 뿐이다.
두경우 모두 사회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그 구성원 일부의 불편을 감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은--완전히 동일하지 않다면--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그 공공의 이익이 나의 개인적 이익에 정면에 대치될 때엔, 공공의 이익의 실체가 불분명해진다는 거다. 내가 소외된 공공 혹은 공공의 이익을 내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냐는 말이다. 이는 사회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공공의 이익이란 없다는 간단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인 셈이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앞서 밝혔듯이 일단 양측의 기계적인 논리 구조는 동일하다는 걸 인정하는 거다. 그런 후에 '공공의 이익'이란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경쟁적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시스템 자체가 중립적이다'라는 인식이다. 무슨 이야기냐면, '능력있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수사로 인해 시스템 자체가 특정 개개인의 편을 들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함정에 빠진다는 거다. 그렇지만 실상은 자본주의 체제는 다른 모든 체제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능력이나 특성을 가진 사람에게 유리하다.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면 이런 거다. 세습적 계급 사회는 '귀한 혈통'이라는 운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철저하게 유리한 구조다. 기술을 갖고 있든 장사에 능하든 아무리 다른 출중한 능력이 있어도 '부모에게 물려받은 피 한방울의 힘'을 극복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능력이 있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점에서는 언뜻 중립적인지 몰라도, 어떤 능력이 있는 자가 살아남느냐에 대한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는 체제이기 때문에 중립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어떤 능력이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여자 양궁 국가대표 선수와 준수한 수준의 한국 프로축구 선수를 놓고 보자. 자신이 하는 분야에서의 능력만 놓고 본다면, 여자 양궁 국가대표 선수가 준수한 수준의 한국 프로축구 선수에 비해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지만, (올림픽 때를 제외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종목의 운동 선수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가치는 거의 없다. 따라서 준수한 수준의 한국 프로축구 선수가 그 노력이나 자기 분야에서의 능력 여하에 관계없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훨씬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릴 수 있다. 물론 양궁 선수들 끼리는 능력이 있는 선수가 살아남겠지만, 사회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단순히 능력이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능력이 있냐 없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다양한 능력 중 오늘날 사회가 특별히 중요하다고 선택한 한가지는 지적 능력이다. 여기서 지적 능력이란 실제로 얼마나 지식과 지성이 풍부하냐의 의미가 아니라 의사, 변호사, 회계사가 되는 데에 필요한 시험을 잘 보는 능력을 말한다. 즉, 우리 사회 구조 내에서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기 때문에 의사, 변호사, 회계사가 된 사람들이 돈을 벌고 성공하는 것이지, 의사, 변호사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분야를 막론하고 최고 수준의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체제 자체가 완벽하게 중립적임에도 불구하고 이 체제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또 조금 예를 들어보자면, 실제로 주먹 세계의 논리가 사회 전체에 팽배해 있다면, 소위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내 앞의 적을 때려눕힐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능력이 있어서 잘 사는 건 맞는데, 그런 나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은 사회적 선택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나의 능력이란 앞서 예를 든 세습적 계급 사회나 주먹 세계의 논리를 택하지 않은 현재의 사회 시스템 내에서만 유의미한 능력이다.
(여기까지는 은하님 이야기의 재탕. 이제부터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은하님의 의견과는 살짝 갈린다. 은하님은 이를 사회에 빚갚는 개념으로 실제로 지배층의 의무의 성격을 강조하시는데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이 경우 이런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이 체제 내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다. 바꿔말하면 이 체제가 전복될 경우 가장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 또한 이들이다. 그래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결국 이들이 이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드는 비용 부담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이 순서가 거꾸로 돼서, '체제 자체가 숭고하기 때문에 전복의 대상으로 삼으면 안 되고, 누구나 이 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비용을 거의 똑같이 부담하라'며 '이에 반대하는 무리배는 체제 전복 세력으로 가만히 둘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볼멘 소리가 안 나올리가... "나한테 해준 것도 없는 사회 체제를 내가 왜 지탱시켜야 되는데?"
그렇지만 체제 자체는 절대로 숭고하지 않다. 아주 솔직히 말해 오늘날 중산층의 두터운 허리(요새는 이게 계속 얇아지는 문제가 있다만)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체제가 무엇이든 삶의 질에 큰 변화가 없다. 몇 안 되는 혈통을 타고날 확률이나, 특정 체제가 선호하는 어떤 능력을 타고날 확률이나 그게 그거다. 이들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요인은 그 체제를 이끄는 지도층의 역량이다. 왕족 사회가 결국 망한 거나, 사회주의가 결국 망한 것은 체제에 대한 아이디얼에 심각한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지도층의 탐욕으로 인해 체제 유지의 부담이 보통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사서 끼고 살던 집값이 오른 것뿐이라면, 집값이 수억이든 수십억이든 실질적으로는 큰 부자가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뿐이라면, 그런 집들이 있는 동네가 제공하는 혜택이 정말 아무것도 없다면, 그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수억, 수십억의 차익을 노리지 않는 것은 단순히 정든 집이라는 감상적 가치에 매달리기 때문일까?
혜택은 때로는 내가 알지 못하는 형태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 혜택까지도 꼼꼼히 헤아릴 책무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받은 혜택들이 있다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혜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그 혜택을 제공하는 체제를 유지하는 비용은 부담하는 게 마땅하다. 이는 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공공의 이익'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거나, 나보다 덜 가진 사람들을 위해 선행을 배푸는 따위의 의무감이나 숭고함과는 상관이 없다. '공공의 이익' 따위에 현혹되지 마시라, 그저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면 그뿐.
교육감 선거 결과에 대한 논쟁이 부동산 문제로 옮아갔다. 강남의 계급성에 대한 내부자와 외부자간의 시각 차이랄까... '갖고 있던 집값이 올랐을 뿐인데 무조건 부자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알고 보면 우리도 서민'이라는 내부적 인식과 '몇천만원짜리 전세도 못 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무슨 배부른 소리냐'는 외부적 인식의 충돌에서 그 어느쪽도 개인적인 경험의 한계를 극복할 생각이 없다면 접점은 별로 없어 보인다.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나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목적이라면, 무조건 힘을 길러서 피아를 갈라 끝없이 싸우다보면 힘센 놈이 이기게 돼 있다. 그런데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면 설령 나의 문제는 해결되더라도 피해자는 언제 어디서나 남아있다는 숙제가 남는다. 물론 그건 싸움에서 이긴 나의 숙제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방이 나한테 다시 덤벼들기 전까지만이다. 상대방이 싸움을 걸어오면, 나는 좋든 싫든 또 싸움에 휘말려 들게 마련.
결국 나의 문제가 사회 전체에서 어떤 맥락을 갖는가에 대해 거시적으로 접근함으로써, 나의 문제를 유발시키는 보다 커다란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인 나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게 현명하단 이야기.
자, 종부세 논란을 살펴보자. '세금 낼 돈이 없어서 이사 가라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질문을 생각해보자. "우리 집을 강제 철거하기 때문에 이사 가라는 건 말이 되는가?" 종부세든 지역개발이든 우리가 속한 사회(종부세나 지역개발만 놓고 이야기를 하자면, 보다 구체적으로는 국가라는 조직이)가 사회 전체의 이익이란 이름으로 행하는 제도적 장치다. 그 제도적 장치의 합리성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지역개발을 빌미로 하는 내집 강제 철거는 불합리하지만 종부세는 합리적이다'라고 판단하는 계층이 있는가하면 '전자는 합리적이지만 종부세는 불합리하다'라고 판단하는 계층이 있는 것 뿐이다.
두경우 모두 사회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그 구성원 일부의 불편을 감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은--완전히 동일하지 않다면--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그 공공의 이익이 나의 개인적 이익에 정면에 대치될 때엔, 공공의 이익의 실체가 불분명해진다는 거다. 내가 소외된 공공 혹은 공공의 이익을 내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냐는 말이다. 이는 사회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공공의 이익이란 없다는 간단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인 셈이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앞서 밝혔듯이 일단 양측의 기계적인 논리 구조는 동일하다는 걸 인정하는 거다. 그런 후에 '공공의 이익'이란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경쟁적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시스템 자체가 중립적이다'라는 인식이다. 무슨 이야기냐면, '능력있는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수사로 인해 시스템 자체가 특정 개개인의 편을 들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함정에 빠진다는 거다. 그렇지만 실상은 자본주의 체제는 다른 모든 체제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능력이나 특성을 가진 사람에게 유리하다.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면 이런 거다. 세습적 계급 사회는 '귀한 혈통'이라는 운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철저하게 유리한 구조다. 기술을 갖고 있든 장사에 능하든 아무리 다른 출중한 능력이 있어도 '부모에게 물려받은 피 한방울의 힘'을 극복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능력이 있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점에서는 언뜻 중립적인지 몰라도, 어떤 능력이 있는 자가 살아남느냐에 대한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는 체제이기 때문에 중립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어떤 능력이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여자 양궁 국가대표 선수와 준수한 수준의 한국 프로축구 선수를 놓고 보자. 자신이 하는 분야에서의 능력만 놓고 본다면, 여자 양궁 국가대표 선수가 준수한 수준의 한국 프로축구 선수에 비해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지만, (올림픽 때를 제외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종목의 운동 선수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가치는 거의 없다. 따라서 준수한 수준의 한국 프로축구 선수가 그 노력이나 자기 분야에서의 능력 여하에 관계없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훨씬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릴 수 있다. 물론 양궁 선수들 끼리는 능력이 있는 선수가 살아남겠지만, 사회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단순히 능력이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능력이 있냐 없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다양한 능력 중 오늘날 사회가 특별히 중요하다고 선택한 한가지는 지적 능력이다. 여기서 지적 능력이란 실제로 얼마나 지식과 지성이 풍부하냐의 의미가 아니라 의사, 변호사, 회계사가 되는 데에 필요한 시험을 잘 보는 능력을 말한다. 즉, 우리 사회 구조 내에서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기 때문에 의사, 변호사, 회계사가 된 사람들이 돈을 벌고 성공하는 것이지, 의사, 변호사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분야를 막론하고 최고 수준의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체제 자체가 완벽하게 중립적임에도 불구하고 이 체제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또 조금 예를 들어보자면, 실제로 주먹 세계의 논리가 사회 전체에 팽배해 있다면, 소위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내 앞의 적을 때려눕힐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능력이 있어서 잘 사는 건 맞는데, 그런 나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은 사회적 선택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나의 능력이란 앞서 예를 든 세습적 계급 사회나 주먹 세계의 논리를 택하지 않은 현재의 사회 시스템 내에서만 유의미한 능력이다.
(여기까지는 은하님 이야기의 재탕. 이제부터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은하님의 의견과는 살짝 갈린다. 은하님은 이를 사회에 빚갚는 개념으로 실제로 지배층의 의무의 성격을 강조하시는데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이 경우 이런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이 체제 내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다. 바꿔말하면 이 체제가 전복될 경우 가장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 또한 이들이다. 그래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결국 이들이 이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드는 비용 부담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이 순서가 거꾸로 돼서, '체제 자체가 숭고하기 때문에 전복의 대상으로 삼으면 안 되고, 누구나 이 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비용을 거의 똑같이 부담하라'며 '이에 반대하는 무리배는 체제 전복 세력으로 가만히 둘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볼멘 소리가 안 나올리가... "나한테 해준 것도 없는 사회 체제를 내가 왜 지탱시켜야 되는데?"
그렇지만 체제 자체는 절대로 숭고하지 않다. 아주 솔직히 말해 오늘날 중산층의 두터운 허리(요새는 이게 계속 얇아지는 문제가 있다만)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체제가 무엇이든 삶의 질에 큰 변화가 없다. 몇 안 되는 혈통을 타고날 확률이나, 특정 체제가 선호하는 어떤 능력을 타고날 확률이나 그게 그거다. 이들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요인은 그 체제를 이끄는 지도층의 역량이다. 왕족 사회가 결국 망한 거나, 사회주의가 결국 망한 것은 체제에 대한 아이디얼에 심각한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지도층의 탐욕으로 인해 체제 유지의 부담이 보통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사서 끼고 살던 집값이 오른 것뿐이라면, 집값이 수억이든 수십억이든 실질적으로는 큰 부자가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뿐이라면, 그런 집들이 있는 동네가 제공하는 혜택이 정말 아무것도 없다면, 그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수억, 수십억의 차익을 노리지 않는 것은 단순히 정든 집이라는 감상적 가치에 매달리기 때문일까?
혜택은 때로는 내가 알지 못하는 형태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 혜택까지도 꼼꼼히 헤아릴 책무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받은 혜택들이 있다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혜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그 혜택을 제공하는 체제를 유지하는 비용은 부담하는 게 마땅하다. 이는 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공공의 이익'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거나, 나보다 덜 가진 사람들을 위해 선행을 배푸는 따위의 의무감이나 숭고함과는 상관이 없다. '공공의 이익' 따위에 현혹되지 마시라, 그저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면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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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취지에 동감합니다.
자유와 그에 상응한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오블리주'라는 약간 미국사회의 기부금과 같은 숭고한 이미지로 파악하기 보다는 국가시스템의 구성원으로서 가지는 몫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조세법을 연구하는 입장으로서 - 몇 년뒤에 제가 헌재에 위헌론을 제기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종부세는 헌법상 문제는 가지고 있는 제도입니다.
비정상적인 부동산시장과 안정적이지 못하고 참여자들을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투기시장에서 임시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는 예외적인 제도이고 이러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공권력에 의한 조정수단도 조세가 아닌 다른 행정적 방법으로 해결을 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부동산시장이 조선중기, 즉 임란과 호란이후부터 지금까지 수탈과 투기의 대상이 되어왔었고 안정된 적이 없기 때문에 '한양수도론'이라는 헌재의 '관습헌법'판결의 취지에 따르면 이러한 종부세도 부동산시장의 안정화라는 장기간의 목적을 통해서 합헌의 논리가 될 수도 있겠군요.^^
부동산시장이 폭락하거나 후퇴하거나 최소한 안정적인 - 물가상승률에 비례하는 정도의 가격상승률인 - 경우에 '원본잠식'이라는 위헌의 기준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지방세인 '재산세'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인데 주택가격이 5천만원이든 50억이든 원본잠식에 대한 문제는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 물론 누진율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
'세금 낼 돈이 없어서 이사 가라는 게 말이 되느냐?'라는 종부세 부담자의 변명은 별로 설득력이 없을 뿐더러 본문에서도 종합적인 고찰이 들어 있지 않아서 댓글로 논의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본문에서는 종부세 부담자의 지역거주에 대한 무형의 이익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이익의 보장자인 시스템에 그 비용을 응당 지불해야 한다는 설명은 있지만 그것이 '그 동네의 더 작은 주택으로 이사해서 그 차액을 이용하여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방법이 있지 않느냐?'라는 반론과 직접적인 비교형량을 하시지 않아서...
(그리고 종부세와 지역개발의 사례를 비교해 놓으셨는데 소유주의 입장에서는 기역개발을 모두 원하고 있는 것이 '개발지상주의' 한국의 실정입니다. 지역개발에서 문제가 되어 왔던 것은 거주민의 생존권 문제이기 때문에 약간 고려해야 할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긴 답변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종부세랑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엮어서 글을 쓰긴 했습니다만, 그 동안 종부세와 관련해서 원본잠식 문제는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네요. 그냥 피상적으로 소득이든 재산이든 많은 사람이 체제 유지 비용을 조금 더 부담하는 게 합리적이다라고 생각해오기만 했는데, 음, 생각보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군요. 반성도 하고 조금 더 고민도 해봐야겠습니다. -_-a
당분간은 유럽으로 출장을 다녀오는 관계로 자세한 이야기는 생각을 조금 더 해보고 정리해서 다음에 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