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초에 은행 구좌 계설을 해야겠어서 와코 시청에 외국인등록을 했다. 그때는 "에이리안 카도가 히츠요-데쓰 (Alien card가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대충 뭉개고 들어가서 90% 영어, 10% 일본어 섞어가며 서류 적당히 작성하고 나왔는데, 신청하면 그 자리에서 발급해주는 게 아니더군. 18일에서 24일 사이에 찾으러 오라고 돼 있어서 어제 찾으러 갔다. 가기 전에 "에이리안 카도를 찾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하면 되겠다 싶어서 '찾다'가 일본어로 뭔지 사전을 찾아봤다. 그런데 뭔지 모르겠는 거다.

예문으로 1) 잃어버린 물건을 찾다, 2) 원인을 찾다, 3) 발자취를 찾다, 4) 사람을 찾다, 5) 광맥을 찾다, 6) 사전을 찾다, 7) 소유권을 찾다, 8) 예금을 찾다 등이 나오는데, 뭐, 당연하게도 일본어로는 각각 다른 동사를 쓰는 거다. 그래서 가만히 위 예문들을 하나 하나 놓고 보니 사실 그 의미가 다 다르잖은가. 그런데 정작 '신분증을 찾으러 왔다'의 '찾다'는 저것 중 어느거에 해당하는지 정확히 모르겠는 거다. 그나마 7번이 제일 가까운 것 같긴 한데 살짝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아, 시바, 어쩌라고... ㅠ.ㅜ

의미상으로는 '받다'와도 통한다 싶어서 '받다'를 사전에서 찾아봤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예문으로 9) 상을 받다 10) 사례를 받다 11) 허가를 받다 12) 석양빛을 받아 빛나다 13) 공을 받다 14) 물을 받다 15) 질문을 받다 16) 손님을 받다 17) 주문을 받다 18) 산파가 아이를 받다 등이 나오는데... 이중에선 13번이 그나마 제일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이건 날아오는 물건을 잡는다는 뜻으로'만' 쓰이는 걸 수도 있겠다 싶은 게 무지하게 헷갈린다.

그나마 익숙한 외국어인 영어로는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할까 생각해보니 "I'm here to pick up my alien card"라고 할 텐데 이 'pick'이란 단어는 또 얼마나 괴상하냔 말이다. 생각나는 용례 몇개만 예를 들어보면 1) 동전을 줍다 2) 과일을 따다 3) 코를 파다 4) 열쇠 없이 문을 따다 5) 우승팀을 예상하여 고르다 6) (차를 갖고) 배웅을 나가다 등등 답이 없긴 마찬가지...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가 여럿 있음에도 이것저것 재보고 이런 용도니까 이 단어가 제일 좋겠군이라고 고르는 대신에, 상황에 가장 적합한 단어를 순식간에 골라낸다는 것, 또 다양하고 복잡한 의미들을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우리는 문맥을 통해서 그 미묘한--가끔은 아주 눈에 확 띄는--의미 차이를 정확히 이해해낸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는 걸 피부로 확 느끼는 순간, 소위 인간이 가진 언어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에도 한번 언급했지만 이에 비하면 인간이 가진 추상적 사고 능력이란 얼마나 더디고 고통스러운 사고 과정이란 말인가... 이 보잘 것없은 추상적 사고 능력을 통해, 어이없는 결론 하나만 내리고 지나가자면, 추상적 사고 능력의 결여가 인간이라는 종의 존망에 위협이 되는 순간이 오지 않는 한, 인간은 말은 잘 하지만 여전히 꽤나 멍청한 동물로 남을 거다, 헛! ㅡㅠㅡ

아무튼 하려던 이야긴 이게 아니고, 이 깨달음이 경이로왔던 만큼이나 '신분증을 찾으러 왔다'는 일본어에 대한 해답 없음으로 인한 절망은 커지는 법... 그렇지만 이 경이와 절망이 혼재한 순간, 언제나처럼 등장하는 구원투수, 그대의 이름은...

일본어와 영어에 모두 능통한 시청직원...일 리는 물론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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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부리군 2009/12/23 2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건 조금 의외로군. 자네가 영어를 배울 때도 꽤 여러 차례 똑같은 상황에 처했던 경험이 있었을 텐데..?
    뭐 그건 그렇다 치고.

    http://naridy.egloos.com/4117515
    http://naridy.egloos.com/4235004

    • BlogIcon 완전영도 2009/12/23 22: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어는 어릴 때 외국에 나가 살면서 별 생각없이 익혀서, 요새 일본어 공부 조금씩 하면서 인간이 언어를 익히고 구사하는 방법에 대해 새삼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 너부리군 2009/12/24 12: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하 그랬군; 난 자네도 평범하게 영어를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구만. 어릴 때 "익혔다"면 확실히 다르지 ㅎㅎ

      이제 한 가지 의문이 더 설명되는군. 실은, 요전에 소위 '분석적 일본어 학습'에 대해 적었던 글도 약간 의외였거든. 뭐 개인 성향 차이는 분명 있겠지만.. 이 나라 애들이 십수 년 영어 배우고도 정작 나가면 한 마디 제대로 못 하는 이유가 다 있다네 -ㅂ-ㅋ

    • BlogIcon 완전영도 2009/12/26 2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언어는 조기교육뿐인가... ㅡㅠㅡ

  2. 라니 2009/12/26 04: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날 재미없는 얘기만 쓰길래 좀 오래 잊고 안와봤더니 다시 재미있어졌군! 기념으로 새삼 링크했음 ㅋㅋㅋ

  3. 2009/12/30 0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럴때의 찾다는 とる(取る)를 쓰는데..
    카드찾으러 왔어요는 :
    '에이리안 카-도(外国人登録証가이코쿠진 도로쿠쇼-외국인등록증)오 토리니 기마시따'
    エイリアン・カードを取りに来ました。
    화이팅 화이팅!!

  4. 2009/12/30 0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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