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범죄의 용의자 갑과 을이 체포됐다. 그런데 이들의 유죄를 증명할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없다. 이 두사람이 모두 결백을 주장하며 침묵을 지킬 경우, 몇가지 경범죄를 적용시켜 6개월형 정도를 내릴 수 있는 게 고작이다. 그래서 검사가 이 두 용의자를 각각 찾아가 똑같은 제안을 한다. 둘중 한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증언할 경우, 증언한 사람은 무죄로 풀려나고, 다른 사람은 10년형을 받는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유죄에 대한 증언을 할 경우엔 두 사람 모두 5년형을 받는다. 두 사람은 서로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어떻게 해야할까?

게임 이론에서 자주 나오는 죄수의 딜레마다. 러셀 크로우가 주연한 (그 보다 제니퍼 코널리가 조연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한 ㅡㅠㅡ) 영화 A Beautiful Mind로 유명한 존 내쉬옹에게 1994년 노벨경제학상을 안겨준 개념 중에 내쉬 평형이란 것이 있다. 쉽게 말하면, 위의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게임에서 두 사람이 상대방의 선택을 알고 있고 상대방은 그 선택을 바꾸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두 사람 그 누구도 자신의 선택을 바꿈으로써 더 이상의 이득을 취할 수 없는 상태를 내쉬 평형 상태라고 한다.

쉽게 말한다더니 전혀 쉽지 않다고? 그럼 일단 도표를 그려보자. 갑과 을이 취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각각 2가지이므로, 총 2x2=4가지 경우의 수가 등장한다.


갑: 침묵 갑: 증언
  을: 침묵 
  갑: 6개월형
  을: 6개월형 
  갑: 무죄방면 
을: 10년형
  을: 증언 갑: 10년형
을: 무죄방면
갑: 5년형
을: 5년형

자, 갑과 을이 서로의 선택을 모르는 상황에서 모두 침묵하기로 결정했다고 하자. 그런데 검사가 갑에게 와서 을의 결정을 알려주며 갑에게만 마음을 바꿀 기회를 준다면? 이 경우에 갑은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는 것이 갑에게 유리하다. 을의 경우도에도 마찬가지.

위 네가지 발생가능한 경우 중,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선택을 번복함으로써 더 큰 이득을 취할 수 없는 경우가 딱 한가지 있는데, 갑과 을 모두 애초에 상대방에 대해 증언하기로 결정한 경우다. 그리고 바로  이 경우가 내쉬 평형이다. 조금 바꿔말하면, '상대방의 선택이 무엇이든 나는 증언을 함으로써 내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고, 고로 갑이든 을이든 서로에 대해 증언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란 결론을 내려야 하는데...

어라라, 근데 그게 아니잖아. 여기 아주 아리까리한 문제가 한가지 숨어 있다. 바로 내쉬 평형 상태와 갑과 을 공동의 이익이 최적화되는 상태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무슨 이야기냐면, 갑과 을이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할 경우 결국은 두 사람 모두 상대방에 대해 증언하기로 결정할 텐데, 그래놓고 보니 어라라 둘다 얌전히 입닥치고 있는 경우보다 결과가 안 좋잖아? 갑과 을이 모두 침묵하는 경우에 두 사람 공동의 이익은 가장 커지는데, 이게 무지하게 불안정한 비평형점이라는 거다. 그래서 죄수의 '딜레마'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이 여기가 아니다.

만약 이 게임을 계속해서 반복해야 한다면? 그럴 경우 두 사람은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게 된다는 것이 라인하트 셀튼옹께서 주장하신 서브게임 퍼펙트 내쉬 평형. 즉, 갑이 을의 눈탱이를 칠 경우, 다음 번에 을이 갑에게 복수할 방법이 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게 되고, 공동 이익의 최적해가 평형 상태와 일치하게 되어 딜레마가 사라진다.

쥔장은 비록 수식 하나 안 썼지만, 수학자/경제학자이신 내쉬옹이나 셀튼옹은 물론 이걸 다 문자와 기호로 풀었다. 에엑, 이런 게 정말 수학이었냐고?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다. 모든 개인은 자기 자신의 이익이 최대가 되도록 행동할 뿐이라는 아주 처절하게 야만적인 전제만이 필요할 뿐이다. (라고 말하는 것도 수학적으로는 엄밀히 옳지 않다. 그렇지만 내가 여기서 게임 이론 증명을 하자는 건 아니니까 넘어가자. ㅡㅠㅡ 뭐, 증명하란다고 앉은 자리에서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_-a 내 전공은 이게 아니란 말이다, 버럭!)

아무튼 여기까지는 게임 이론 이야기. 실제 세상은 과연 어떨까? 뭐,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한국 사회는 지독한 죄수의 딜레마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사가 짧은 만큼, 이 죄수 게임을 반복한 경험 역시 짧다. 그 와중에 과거 친일파나,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쿠데타 정부, 그리고 그 맥을 잊는 민정-민자-신한국-한나라당의 정당사,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삼성과 이건희로 대변되는 거대 자본에 대한 계속되는 봐주기로 인해 사회정의는 철저하게 실종되고, 권력이든 돈이든 쥐고 상대를 엿먹일 수만 있다면 나는 무죄, 너는 10년형이라는 경쟁적인 인식만이 꽃을 피웠다. 덕분에 너도 죽고 나도 죽는 오리지널 내쉬 평형 상태로 정말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니미.

그 결과 삶이 피폐하다. 2007년 12월, 부푼 꿈 따위를 안았을 리는 물론 없고, 그저 귀향의 기쁨을 안고 돌아온 대한민국에서 4달을 살고 배운 것은 그것 하나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의 삶은 피폐하더라는 것. 어떻게든 무죄방면이 되기 위해 그토록 애쓰는 이 나라의 서민들 중 정녕 행복해보이는 사람은 없다. 이제 고작 만 7년 4개월이 지났을 뿐인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사는 게 전쟁'이다. 먹고 사는 일도 전쟁이고, 배우고 가르치는 것도 전쟁이다. 이미 무죄 판결을 받고 이 전쟁터에서 떠나버린 이들의 삶만이 조금 여유로울 뿐...

저녁에는 이 피폐한 삶에 대해 술 한잔에 한숨을 곁들여 울분을 토로하고는 다음날 아침 다시 전쟁터로 나간다. 뭔가 잘못된 건 알겠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고, 이건 아닌데 싶어도, 뭐가 아닌지를 모른다. 지난 50년 동안 사회정의가 발붙이지 못한 이 땅에 '공동의 이익'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믿음 따위는 없다. 이렇게 사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나 역시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앞집에 사는 그 녀석이 나에게 10년형을 남기고 자신은 유유히 무죄로 걸어나갈까봐 두려운 거다. 이렇게 살기 싫은데, 이렇게 안 사는 사람만 병신되는 거 아니냐는 걱정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이택광님의 이야기처럼 '예전에 가투 몇 번 나갔던 경력을 자랑 삼아, 술자리에서 민주주의 위기를 걱정하고, 집에 돌아오면 과감하게 교육과 부동산을 위해 보수주의자로 변신'한다.

상대방이 나를 믿지 않는다면, 나 또한 상대를 믿지 않는 것만이 게임의 법칙. 이 법칙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이젠 '상대방이 나를 믿기만 한다면 나 또한 그를 믿어줄 텐데'라는 아쉬움조차도 쓸데없는 감상이 된지 오래.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이 치열한 세상 속에서 최대한의 혜택을 누릴 방법만이 관심사다. 갖지 못한 설움, 배우지 못한 설움이 그런 설움을 주는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아닌, 가진 자와 배운 자에 대한 적개심이 된다. 그래서 내가 갖고 배우기만 하면 해결이 되는 문제다. 내가 갖고 배우게 됐을 때에도 미처 갖고 배우지 못하고 남아 있는 자들에 대한 연민 따위는 없다, 이것 역시 게임의 법칙. 생존경쟁은 잔인한 것, 그 잔인함을 치유할 책임 따위는 내게 없다. 그것 또한 게임의 법칙. '공동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방법도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남은 건 탐욕이다.

늘상 말한다. 먹고 사는 일 앞에 도덕성도 사회정의도 사치라고. 그렇지만 사회정의가 없는 덕분에 오늘날 먹고 사는 일이 이렇게나 힘들어졌다는 걸 왜 모를까? 그저 민생만 살려놓으면 친일 행적도 봐주고, 독재도 봐주고, 삥뜯기도 봐줄 테니, 먹고 살게만 해달라는 아우성, 오늘의 이 피폐한 삶은 그 아우성의 댓가다. 적당히 내 배를 채워주는 사람이라면 법 위에도 군림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놓고나니, 적당히 배만 불러서는 성이 안 찬다. 저 사람이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권력, 민주적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노력만 하면 내것일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저 권력이 탐이 난다. 저 권력을 쥐지 못하면 끝없이 억압받고 착취당할 것만 같기도 하다. 문제는 사회정의가 실종된 민주주의라면, 그런 권력이 실재하더라도 민주주의가 보장해야할 평등권이 없기에 나는 그 권력을 가질 수 없다. 그저 그 권력을 바라보며 허우적댈 뿐이다. 정정당당한 민주주의라면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은 존재하지 않기에 이 또한 나는 가질 수 없다. 박정희의 업적을 찬양하는 우리는 이 돌고도는 모순의 소용돌이에 갇혔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남은 건 어리석음이다.

이 모순의 소용돌이 안에서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고 싶어도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 내가 살던가, 아니면 네가 살던가의 이땅에서 누군가 약간의, 아니 지금의 누군가는 엄청난 손해를 보며 살 단호한 결의가 없다면 이땅에서의 삶은 앞으로도 한동안은 피폐할 수밖에 없다.

@ 그런데 남들이 손해볼 각오를 안 하는데 왜 나만 손해를 봐야 하냐고? 내 인생은 이미 조졌다고 생각하고, 우리 애들 사는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준다고 생각하면 되지, 뭐. 어차피 아이들을 위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다 가는 인생들 아녔수? ㅡㅠ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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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zabel 2008/04/21 18: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출처를 밝히고 제 블록에 퍼갔는데 괜찮으실 지요.
    (__)

    • BlogIcon 완전영도 2008/04/21 19: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댓글 다신 후에 글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아무튼 글을 퍼가는 것 보다도 더 중요한 건, 가끔은 손해도 보면서 살아주세요. ^^,,

  2. BlogIcon 변두리 2008/04/21 2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도 5~6년 정도의 독일생활을 마무리하고 조만간 한국에 다시 적응해야 하는 입장인데 10년 전에 비해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감이 잘 안옵니다.

  3. BlogIcon 미아 2008/04/22 0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광택"님이 아니라 "이택광"님이겠지? ㅎㅎ

  4. 노동놀입 2008/04/29 1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탐욕...
    탐욕이 부끄럽지 않고 일상에서 유유히 흐릅니다. 미치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