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님의 강남이 왜 욕을 먹느냐구? 구한말 사대부를 보라에서 트랙백.
북미를 비롯하여 남미, 남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서 골드 러쉬가 한창이던 19세기, 커다란 금광의 발굴과 함께 1870년대 이후로 골드 러쉬의 새로운 표적(?)이 됐던, 현재는 사우스 다코타의 작은 한 마을인, 데드우드를 배경으로 HBO에서 제작한 서부극 드라마 데드우드(Deadwood) 첫시즌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이 대사 속에 담긴 통찰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이런 대사를 작렬할 수 있는 작가가 있다니,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왜 흔히들 말하는 선의를 갖고 행한 행동이 불행한 결과를 낳곤 할까? 이 문제의 답은 바로 '선의'라는 개념의 정의에 있다. 사실 절대로 선해서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혹은 최소한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의지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의 이익을 더 위에 둘 것인가'라는 우선순위라는 개념이 동시에 등장한다. 많은 경우에 이 우선순위의 가장 꼭대기에는 나라 는 존재를 올려놓는다. 이런 우선순위의 결과로 타인에게 크게 피해를 준다면 이를 '이기적'이라며 비난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많은 경우에 이는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누군가 이에 반하여 나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우선순위에 둘 경우, 우리는 이들을 '이타적'이라 부르며 이들의 선의를 칭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기적이든 이타적이든 '누군가에게는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한다'는 의미에서 행위의 본질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또 조금 복잡해진다. 이해관계라는 건 꽤나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이기적인 행위의 결과가 기이하게도 자신에게 손해로 돌아오기도 하고, 이타적인 행동의 결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앞선 데드우드의 에피소드에서 닥터 코크란이 염려하는 부분이 바로 그런 부분이다. 불록과 히콕의 '소녀를 염려하는 마음'이 소녀를 해하는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거다.
선의의 본질이 실제로는 악의의 본질과 동일하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옳은 일 혹은 그른 일이라고 당연시할 수 없다. 닥터 코크란이 그랬듯, 모든 행위에 앞서 그 행위의 결과를 꼼꼼히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고민의 끝에서 결단이 필요하다. 그렇게 고민하고 행동한 후에조차도 그 결과는 우리의 의도와 다를 수 있다.
사건 하나 하나에 대해 단순히 외부의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서 행동하는 것은 간편하지만, 위험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과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 개인들로부터 분리시켜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거다.
돈 있는 집에서 나고 자라 이 모든 돈과 권력을 끝없이 세습할 수 있다면, 이 악랄한 사교육의 쳇바퀴가 더없이 아름답겠지만, 내 비상한 재주와 머리, 돈에도 불구하고 멍청한 내 유전자가 실수를 해서, 내 자식이 세상의 모든 과외로도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하다면, 그때 내 자식과 내 자식의 자식들은 누구의 손에 맡겨야 안심할 수 있을까? 그때 그들이 이 악랄한 사교육의 쳇바퀴를, 그리고 이 쳇바퀴를 만들어낸 당신들을 격렬하게 저주한다면, 그때조차 당신은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며 쿨할 수 있겠는가?
세상은 평등하지 않고, 우리도 한없이 평등한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이 치열한 세상을 '너는 고통 받지만 나는 아니다 (혹은 덜 받는다)'가 아니라 '일부 (혹은 다수)는 고통 받고 일부는 아니다'라고 봐달라는 거다. 고통과 평안을 가르는 경계가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하고, 지금은 우연히 혹은 어떤 이유로든 나는 경계의 이편에, 너는 저편에 있는 것 뿐이라고 봐달라는 거다. 그때 그 일부가 받는 고통은 신기하게도 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누구나 잘 알듯이--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두손 두발 다 걷어붙이고 메달리지 않던가.
I see as much misery outta them movin' to justify theirselves as them that set out to do harm.
- Doctor Cochran, "Deadwood, HBO"
북미를 비롯하여 남미, 남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서 골드 러쉬가 한창이던 19세기, 커다란 금광의 발굴과 함께 1870년대 이후로 골드 러쉬의 새로운 표적(?)이 됐던, 현재는 사우스 다코타의 작은 한 마을인, 데드우드를 배경으로 HBO에서 제작한 서부극 드라마 데드우드(Deadwood) 첫시즌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어느날 저녁, 한 사람이 '데드우드를 떠나던 노르웨이인 한 가족이 인디언들에게 습격을 받았다!'며 호들갑을 떨고 데드우드에 찾아온다. 이 인물의 증언을 들은 전직 보안관인 와일드 빌 히컥과 세쓰 불럭을 비롯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 인물의 안내(?)를 받아 현장을 찾아가는데, 인디언 습격 현장보다는 약탈 현장에 가깝다. 마침 여자 아이 한명이 생존해 있어, 이 아이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와 마을에 하나뿐인 의사(닥터 코크란)에게 아이를 맡긴다.
와일드 빌 히컥과 불럭은 처음 '인디언 습격!'을 주장한 인물이 이 노르웨이인 가족들을 학살하여 금품을 탈취한 후 자신의 범행을 숨기기 위해 '인디언 습격'을 가장한 게 아닌가 의심을 하여, 그가 마을을 떠나려하자 '아이가 낫는 모습만이라도 보고 가라'고 설득(?)한다. 와일드 빌 히컥과 불록의 다소 강경한 태도에 움찔한 그는 이 민첩한 총잡이들을 상대로 총을 재려다 목숨을 잃는다.
코크란과 캘러미티 제인의 정성어린 간호로 아이는 조금 차도를 보이는데, 다음날 불록이 찾아와 아이의 상태를 묻자 코크란이 '살지 못살지 알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제인이 코크란에게 '저 친구가 아이를 구해온 사람인데, 왜 믿지 못하는 거냐'고 의아해하자, 코크란이 대답하기를 '설령 저 사람이 아이를 해할 뜻이 없다 하더라도, 이 아이가 건강해졌다는 사실을 알면, 이 아이로부터 노르웨이인 가족을 습격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할 텐데, 만약 와일드 빌 히컥과 불록이 죽인 인물에게 배후나 공범이 있다면, 이 아이의 운명이 어찌 되리라 생각하냐'고 반문한다. 제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당신 세상 정말 삐딱하게 보는군'이라고 말하지만, 코크란은 '원래가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나 애초부터 남을 해하려던 사람이나 그 나물에 그 밥'라고 답한다.
이 대사 속에 담긴 통찰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이런 대사를 작렬할 수 있는 작가가 있다니,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왜 흔히들 말하는 선의를 갖고 행한 행동이 불행한 결과를 낳곤 할까? 이 문제의 답은 바로 '선의'라는 개념의 정의에 있다. 사실 절대로 선해서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혹은 최소한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의지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의 이익을 더 위에 둘 것인가'라는 우선순위라는 개념이 동시에 등장한다. 많은 경우에 이 우선순위의 가장 꼭대기에는 나라 는 존재를 올려놓는다. 이런 우선순위의 결과로 타인에게 크게 피해를 준다면 이를 '이기적'이라며 비난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많은 경우에 이는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누군가 이에 반하여 나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우선순위에 둘 경우, 우리는 이들을 '이타적'이라 부르며 이들의 선의를 칭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기적이든 이타적이든 '누군가에게는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한다'는 의미에서 행위의 본질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또 조금 복잡해진다. 이해관계라는 건 꽤나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이기적인 행위의 결과가 기이하게도 자신에게 손해로 돌아오기도 하고, 이타적인 행동의 결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앞선 데드우드의 에피소드에서 닥터 코크란이 염려하는 부분이 바로 그런 부분이다. 불록과 히콕의 '소녀를 염려하는 마음'이 소녀를 해하는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거다.
선의의 본질이 실제로는 악의의 본질과 동일하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옳은 일 혹은 그른 일이라고 당연시할 수 없다. 닥터 코크란이 그랬듯, 모든 행위에 앞서 그 행위의 결과를 꼼꼼히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고민의 끝에서 결단이 필요하다. 그렇게 고민하고 행동한 후에조차도 그 결과는 우리의 의도와 다를 수 있다.
사건 하나 하나에 대해 단순히 외부의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서 행동하는 것은 간편하지만, 위험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과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 개인들로부터 분리시켜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거다.
돈 있는 집에서 나고 자라 이 모든 돈과 권력을 끝없이 세습할 수 있다면, 이 악랄한 사교육의 쳇바퀴가 더없이 아름답겠지만, 내 비상한 재주와 머리, 돈에도 불구하고 멍청한 내 유전자가 실수를 해서, 내 자식이 세상의 모든 과외로도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하다면, 그때 내 자식과 내 자식의 자식들은 누구의 손에 맡겨야 안심할 수 있을까? 그때 그들이 이 악랄한 사교육의 쳇바퀴를, 그리고 이 쳇바퀴를 만들어낸 당신들을 격렬하게 저주한다면, 그때조차 당신은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며 쿨할 수 있겠는가?
세상은 평등하지 않고, 우리도 한없이 평등한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이 치열한 세상을 '너는 고통 받지만 나는 아니다 (혹은 덜 받는다)'가 아니라 '일부 (혹은 다수)는 고통 받고 일부는 아니다'라고 봐달라는 거다. 고통과 평안을 가르는 경계가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하고, 지금은 우연히 혹은 어떤 이유로든 나는 경계의 이편에, 너는 저편에 있는 것 뿐이라고 봐달라는 거다. 그때 그 일부가 받는 고통은 신기하게도 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누구나 잘 알듯이--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두손 두발 다 걷어붙이고 메달리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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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글을 너무 잘쓴다. 정말 잘쓴다. 잘읽었다.
칭찬 감사합니다(서...설마 반어법? ㅡㅠㅡ)........만 제가 아는 분이신가요? 아니, 그냥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 던지시길래, 긁적... -_-a
트랙백 감사합니다. 마지막 문단은 도로 긁어가고 싶네요..^^
저도 그 프레임에 입각해서 썼지만, 강남 대 비강남의 대결이 되어버린 교육문제의 프레임을 다르게 볼 여지가 있을 거 같아요. 사실은 그래야 개선이 되는데 ㅠㅠ
그렇죠. 흔히 말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국내 현실에서는 조금 더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배푸는 호의 정도로 취급해 버리면서 특별한 자들이나 행할 수 있는 특별한 선행 정도로 보니까, 많은 이들이 '우리가 왜?'라며 이를 강.요.당한다는 느낌을 받는 것 같습니다. 사실 소수의 '희생'을 댓가로 공동체를 지탱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닌가요? ㅋ 문제는 공동체의 이익과 나의 이익이 배타적이지 않다는 걸 설득시킴으로써 가진자 vs 못가진자의 대결 구도를 와해시키는 거겠죠.
뒤늦게 첨언을 하자면, 문제의 발단은 사람들의 가치 판단은 개인의 경험을 통해서 이뤄지는데, 개인의 경험이란 제한적이라는 거겠죠. 강남에서 조금 못사는 축에 끼는 사람의 경우, 일년에 한두번 휴가 때 지방을 찾는 정도 외에 강남을 벗어나서 생활해보지 않는다면, 상대적 박탈감이 그 개인의 경험을 지배하겠지만, 평생 바둥대고도 강남에 진입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그 박탈감을 배부른 자의 사치 정도로 바라보는 그런 현상이요.
개인간의 경험의 편차는 워낙 큰데, 그걸 그런 개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면 결국은 그 편차가 극복이 안 되는 사람들끼리는 싸움 밖에 안 나는 거죠. 조금 더 넓게 보면, 선진국의 저소득층이 경험하는 박탈감과 극빈국가의 국민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같은 맥락이고요.
그래서 간접 경험을 통해 개인적 경험을 초월하는 거시적 안목이 필요한 건데, 교육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니 그게 안 되죠. 사실 교육감 선거의 결과가 안타까운 건, 그걸 바로 잡을 기회를 또 놓쳤다는 거겠죠. 아무래도 이게 선거다보니 교육 문제에도 정치에 대한 민심의 이반현상이 그대로 투사된다능...
오.. 정말 잘 썼네.
우리나라 사람들 명박이 욕하는 와중에도 또 공정택 뽑는 거 보고 난 정말 이 나라에 가망은 없다는 생각이 점점 깊어진다.
* 마지막 줄 "메달리지" -> "매달리지" (ㅐ/ㅔ 장애는 여전하구나 ㅎㅎ)
뭐, 저는 '이 나라에 가망은 없다'까지는 아니고, '내가 죽기 전에 밝은 세상 보긴 틀렸다' 정도?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