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에 해당되는 글 336건

  1. 2011/03/21 진실은 비싸다 (3)
  2. 2011/02/22 Has a Person Like This Ever Existed?
  3. 2011/02/09 노벨상? (2)
  4. 2011/01/29 친구를 보라 (1)
  5. 2011/01/25 Why Everyone (Else) Is a Hypocrite
  6. 2011/01/25 아이러니
  7. 2011/01/17 단 하나뿐인 모순 없는 진심 (1)
  8. 2011/01/14 신뢰의 도약(Leap of Faith) (1)
  9. 2011/01/11 사랑과 자격 (2)
  10. 2011/01/05 유유상종
여자 : 나 살 찐 거 같아.
남자 : 아냐, 지금이 딱 보기 좋아.
여자 : 그래? 정말? 좀 찐 거 같지 않아? 솔직하게 얘기해봐. 다이어트해야 되면 다이어트 하게.

이어질 대화에서 남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1) 정말 솔직하게 말해도 돼? 조금은 빼도 될 거 같아.
2) 아니라니까, 정말 지금이 보기 좋아.

이 상황에서 1번을 고른 남자는 대부분 머저리 취급을 당한다. -_-,,


한 회사의 회식 자리, 술도 다들 조금 올랐겠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부장 : 다들 나 때문에 고생 많지? 내가 이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성격이 좀 급하다보니 자네들 자꾸 닥달하게 되는구만.
직원들 : 아닙니다, 부장님. 별로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장 : 에이, 아니긴. 뭐, 오늘 말 나온 김에 그 동안 불만들 있었던 거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자릴 갖자고.
직원들 : 불만이라뇨, 부장님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부장 : 아냐, 아냐, 정말 내가 기분 안 나빠할 테니까, 솔직하게들 다 얘기해보라고. 그래야 나도 뭐가 문젠지 알고 고쳐야할 부분이 있으면 고치지.

다음 상황에서 직원들이 취해야 할 반응은?

1) 부장님은 다 좋은데요, 이게 문제에요. *^$%# %$@^&%&%.
2) 부장님이 저희한테 얼마나 잘해주시는데요. 그런 거 없습니다.

이걸 잘못하면 조금 극단적이긴 해도 이런 상황(클릭)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집들이를 하면서 친구들을 초대한다. 필요한 건 다 갖췄으니 맨손으로 오라고 한다. 이런 경우에 친구들의 적절한 반응은?

1) 맨손으로 오랬으니 정말 맨손으로 간다.
2) 아무리 맨손으로 오라고 했더라도, 예의상 맨손으로 가는 건 결례라 선물을 사 간다.

여기서 1번을 선택하면 그 집엔 두번 다시 초대를 못 받는다. -_-,,


친구가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며 목돈을 빌려 달라고 한다. 친구끼리는 돈 거래는 하는 게 아니라고 믿어서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며 정말 힘들면 이 돈은 갚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 경우 돈을 빌려간 친구의 적절한 반응응?

1) 안 갚아도 된다고 했으니 정말 안 갚는다.
2) 안 갚아도 된다고 했지만, 이돈은 내 돈이 아니라 친구의 돈이니 천천히라도 사정이 좋아질 때 갚는다.

이때 갚지 말랬다고 진짜 안 갚으면, 그걸로 절교하는 거다. -_-,,


이런 모든 케이스들이 다 진실과 시그널링의 줄타기이다. 앞에서 여자, 부장, 집주인, 돈 있는 친구들은 모두 자신에 대해 자신은 너그럽고, 자신이 결점(?)이 있는 사람이란 걸 받아들이고 있으며, 상대방의 솔직함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상대방이 그걸 알아주길 바라고 그런 시그널을 보낸다. 그리고 이런 시그널을 보내는 시점에는 대부분 자신의 이 시그널들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상대방이 2번 대신에 1번의 행동을 보이면,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다. 왜일까?

사람은 자기 진심이 뭔지 자기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진심을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의식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감정이 자신의 진심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기인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우리의 감정과 사고체계는 극히 한정돼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더라도 받아들일 각오가 돼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그리고 자신이 너그럽고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는 시그널을 남들에게 보내는 과정에서, 그 시그널에 상대방은 안 속았는데, 정작 자신이 속아서, 자신이 정말 너그럽고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는 착각을 한다. 스스로가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열린 마음을 갖고 잘해주다니, 난 정말 괜찮은 사람인가 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상대방이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못 알아준다는 인식이 되기 때문에도 역시 기분이 나쁜 거다.

조금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유로, 상대방에게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고 했기 때문에, 그 조건 하에서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 칭찬을 한다면 그 칭찬은 정말 자신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는데, 상대방이 그 기대를 무너뜨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듣길 원하는 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가 진실이라고 생각한 내용을 확인해주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2번을 잘 하는 사람이 예의 바르고 착한 사람, 1번을 하는 사람은 고지식하거나 눈치 없고, 때로는 거칠고 무례한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진실은 거의 항상 은폐된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 다른 사람의 직언을 듣고 싶어서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말하는 상황일지라 하더라도,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말이 진심인지, 그저 난 열린 자세를 갖고 있다는 시그널을 보내고 있는 건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방 입장에서는 후자라고 가정하는 게 안전하고, 그냥 내가 듣기 좋은 말만 하게 되기 일쑤다.

이런 식으로 진실은 은폐되고, 그걸 캐내는 비용은 비싸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정말 진실을 알고 싶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온 세상이 바가지를 씌우는 상황인 셈이다. "솔직히 말해도 된다"는 상대방조차 믿지 않는 말 대신에 무얼 떻게 하면, 내게는 정말로 상대방의 가공되지 않은 솔직한 의견이 중요하다는 걸 확신시킬 수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이건 정말 답이 없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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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ine someone making the following statement of religious conviction:

I believe Jesus was born of a virgin, was resurrected, and now answers prayers because believing these things makes me feel better. By adopting this faith, I am merely exercising my freedom to believe in propositions that make me feel good.

How would such a person respond to information that contradicted his cherished belief? Given that his belief is based purely on how it makes him feel, and not on evidence or argument, he shouldn't care about any new evidence or argument that might come his way. In fact, the only thing that should change his view of Jesus is a change in how the above propositions make him feel. Imagine our believer undergoing the following epiphany:

For the last few months, I've found that my belief in the divinity of Jesus no longer makes me feel good. The truth is, I just met a Muslim woman who I greatly admire, and I want to ask her out on a date. As Muslims believe Jesus was not divine, I am worried that my belief in the divinity of Jesus could hinder my chances with her. As I do not like feeling this way, and very much want to go out with this woman, I now believe that Jesus was not divine.

Has a person like this ever existed? I highly doubt it. Why do these thoughts not make any sense? Because beliefs are intrinsically epistemic: they purport to represent the world as it is.

- Sam Harris, The Moral Landsc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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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분류없음 2011/02/09 16:20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2/07/2011020701000.html

우리나라 사람들 노벨상 참 좋아한다.
그래, 마차로 말을 끄는 짓도 자꾸 하다보면 뭐가 잘못됐는지 알... ...까, 이놈들이?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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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 친구들을 보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유유상종"의 개념에 입각해서 통용되는 말인데, 여기엔 사실 그 이상의 통찰력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칭찬에 인색한 편이고, 내 주변에도 칭찬에 후한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해보자. 새로 취직을 했는데, 입사 초기에 직장 상사가 나에게 칭찬을 했다. 일반적으로 나는 내 경험에 의존해서 그 칭찬을 해석하기 때문에, 내가 정말 일을 잘했구나라고 생각해서 우쭐하기 쉽고, 그 직장 상사는 나에게 칭찬을 해준, 나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게 사실 사람들이 엄청 쉽게 빠지는 함정이다.

그렇지만 그 칭찬의 의미와 그 직장 상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 경험이 아니라, 칭찬을 하는 사람의 경험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즉, 그 직장 상사가 나 이외의 다른 사원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지, 그들에게도 일상적으로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하는지가 훨씬 중요한 고려의 요소다. 나에게 했던 칭찬이 어떤 뜻이었는지, 그 칭찬을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직장 상사의 경우 칭찬이 지나치게 헤프지는 않은지 따위의 맥락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이야기.

그걸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나와 어떤 관계를 유지하느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느냐를 이해하는 것 역시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친구들을 보라는 말은, 그 친구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이 그 친구들과 어떤 언어와 몸짓으로 소통을 하는지를 보라는 말이기도 하다... ...고 나는 생각한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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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Kurzban의 "Why Everyone (Else) Is a Hypocrite"을 읽기 시작했다. 아래는 책 초반에 나오는 예.



A와 B가 적힌 두 사각형은 실제로는 같은 색깔이지만, 이게 같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이게 같아 보이진 않는다. 인간은 머리와 마음의 서로 다른 영역에서 발생하여 충돌하는 모순들--예를 들어 이 두가지 색이 같다는 지식과 이 두가지 색이 다르게 보인다는 관찰--을 모두 자체적으로 해소할 수 있게끔 진화하지 않았기 때문.

'딱히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걸 알아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한 마디가 진실임을 알아도, 내 탓인 것 같고, 이 상처가 영원할 것 같은 이 막막함으로부터 달아날 순 없다. 인간이란 동물, 진화 한번 참 멋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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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

분류없음 2011/01/25 20:23
실연의 최대 아이러니는... 힘든 시기를 견디는 데에 가장 힘이 될 것 같은 한 사람이, 정작 이 힘든 순간에 당신 곁에 있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란 사실이다.

You've got to give a little, take a little, let your poor heart break a little, that's the story of, that's the glory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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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한 아가씨와 뜻대로 잘 안 된 이야길 사람들에게 하면 하나들 같이 "어쩌겠냐, 잊어버려"라고 한다. 시간 지나면 해결 된다고...

머리로는 이 말보다 더한 진실은 없다는 게 받아들여지는데, 마음으론 도저히 안 된다. 사실 이 블로그에도 몇몇 일화들이 있다시피, 연애/데이트에 관한한 삽질이야 해볼만큼 해본 인간이라, 알지도 못하는 아가씨한테 괜히 차 한잔 하자고 말 붙였다가 딱지 맞고 돌아선 경험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럴 때도 사실 허탈감, 아쉬움, 또 경우에 따라선 생각지 않았던 고통에 빠지곤 했는데, 그 정도의 차이일 뿐 실연의 아픔이란 게 본질적으로는 다 같은 감정일 거라고 생각하면,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모레, 모레가 아니면 그 다음날, 그렇게 하루 하루 지내다보면 언젠간 "이젠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을 거라는 거, 아마 사실이겠지. 다들 그렇게, 나보다 더한 실연의 아픔도 견디며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 누군가를 좋아할 땐, 그 감정이 진심이라고 생각하잖아. 내가 좋아하는 상대방도, 내 감정도 아주 특별하다고... 나의 진심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는 달리 아주 특별해서, 상대방이 날 좋아하느냐 마느냐와는 상관 없다고... 상대가 날 좋아하든 말든, 그 사람을 향한 이 특별한 내 감정은 진짜라고... 그리고 이런 내 감정을 상대가 온전히는 아니더라도 쬐금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상대가 날 외면했다고, 더 이상 아무 희망이 없다고 '어쩌겠어, 이젠 잊어야지'라고 생각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은 지워지고, 또 조금은 덧입혀져--비록 그 흔적은 조금 남을지라도--내가 상대를 좋아했던 마음이 무뎌지기를 기다린다는 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

결국 그때, 누군가에게 푹 빠져 있던 바로 그때 '이건 상대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내 모든 걸 건 진심'이라고 나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거짓말을 했던 거거나, 지금, 상대에게 외면 당하고 상대를 잊으려는 지금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돼'라고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둘 중 어느 한 순간엔 내 마음이 거짓이어야 한다는 얘기잖아.

물론 진실이란 게, 특히 사람 마음이라는 기이한 물건에 관한 진실이란 게 고정불변의 어떤 것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면, 그 순간엔 그게 진실이었고, 지금은 이게 진실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너무 편리하잖아. 납득할 수 없는 건지, 납득하기 싫은 건지는 몰라도 무슨 놈의 진실이 그따구야? 상대방이 나란 인간을 한번쯤 믿고 의지할만한 인간이라고 생각해주길 바라면서 나름 그 사람 마음을 얻기 위해 공을 들인다고 들였는데, 냉큼 돌아서서 이제는 다시 '이건 안 되는 거였나봐, 잊어야지'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야 한다면, '내 진심은 특별하니 알아달라'던 내 모습이 너무 위선적이잖아. ㅠㅠ

사람들은 이 자아분열적 모순을 스스로에게 어떻게 설명하지?

그리고 혹시... 정말 혹시,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라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지금 체념하고 포기해서 어느날엔가 '지금 이 감정도 그렇게까지 특별한 건 아니었구나'라는 걸 알아버린 후에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 가서 또 다시 "그 때 그 감정은 가짜였는지 몰라도, 지금은 또 달라"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잖아. 결국 이런 모순들을 맞딱뜨리지 않으면서 내 진심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지금 이 감정은 상대가 외면한 이 순간에도 진짜다'라고 믿는 것밖에 없는 거 같다. 그래서 포기가 안 되는 거 같다.

@ 언제부터 이렇게 순정파셨수? -_-,, 그러게... 쯔쯔...
@@ 31살짜리 highly functional and analytical brain이 십대 소년의 연애 감성을 만나면 이렇게 되는 거구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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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공부를 많이 안 해서 플라톤이 인간의 정신 세계를 살찌우는데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 감이 잘 안 오는데,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감성과 이성의 구분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엿먹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감성과 이성의 관계를 마차에 비유하며, 감성은 말, 이성은 그 말을 조정하는 마부와 같다고 봤는데, 이는 감성을 이성을 이용하여 통제해야 할 어떤 것으로 바라본 거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들 중 비이성적 판단, 생각없는 바보짓, 충동구매 따위는 모두 이런 플라톤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언어들이다.

1982년 엘리엇이란 사나이가 신경과전문의 안토니오 다마시오를 찾아온다. 엘리엇은 수퍼마켓에서 시리얼 하나를 고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결정장애를 겪고 있었다. 그의 이력을 살펴본 다마시오는, 그가 대뇌피질에서 발견된 종양을 제거한 후부터 그런 증상이 나타났다는 걸 알았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고 전했고, 엘리엇과 수차례 상담을 한 다마시오 본인도 엘리엇이 감정을 느끼는 중추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을 했다.

그런 그의 가설을 시험하기 위해 다마시오는 엘리엇에게 보통의 사람이라면 격렬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킬만한 사진들을 보여주며 땀샘의 반응을 살펴 봤는데, 엘리엇은 그 어떤 사진에도 감정적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냈다. 그 후 다마시오는 엘리엇과 비슷한 뇌손상을 입은 환자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게 되는데, 그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인지능력과 지적능력을 보였음에도 심각한 결정장애를 안고 있었다.

대체 왜,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 문제는 엘리엇에게도 있었지만, 플라톤을 아무 생각없이 따른 우리에게도 있었다. 우리는 다양한 변수들을 충분히 고려할 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감정의 도움 없이는 시리얼 하나를 고르는 간단한 일에서조차도, 색깔, 영양성분, 원재료, 맛 등의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절대적 우위를 점하는 어떤 한가지를 고르는 합리적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를 놓고 끊임없이 갈등하며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게 인간이란 동물.

실상은 감성이 갈갈이 찢겨져 이리저리 휩쓸릴 때 이를 이성이 바로 잡아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게 아니라, 이성이 이것저것 다 고려하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감성이 그 무게추를 살짝 기울임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게 뭔지를 알게 된다. 그래서 데이빗 흄의 "Reason is, and ought only to be the slave of the passions."이란 한마디는 너무도 정확하고 날카롭다.

극도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에게 사람을 사귄다는 일은, 그게 친구를 만드는 일이든 연애든, 불가능하다. 인간은 누구나 결점이 있고, 나에게 "따~악" 맞는 친구란 없다. 실연의 아픔이란 게, 상대가 누구였든 시간이 지나면 결국 무뎌지고 잊혀지게 마련이라면, 나에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없어선 안 될 존재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시점에선가는 두눈을 질끈 감고 상대에게 의지하는 신뢰의 도약(leap of faith)을 할 필요가 있다.

In God, we trust. In (some) people, we also trust, however unreasonable it seems. (And of course, all others must bring data.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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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자격

분류없음 2011/01/11 13:16
Man naturally desires, not only to be loved, but to be lovely;
or to be that thing which is the natural and proper object of love.
- Adam Smith, Theory of Moral Sentiment

작년 10월 23일, 소개팅을 했다. 나는 그녀를 많이 좋아했는데, 그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외모지상주의자인 본인의 맘에 들었을 정도니 그녀는 물론 두말할 것 없이 예뻤다, ㅋㅋㅋ. 게다가 사람을 미워할 줄 모를 것 같은 맑은 성품의 아가씨였다. 지금은 이것 때문에 제일 힘든 것 같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 받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단순히 "난 사랑 받고 싶어, 날 사랑해줘!"라며 그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사랑 받기를 원한다. 우리는 상대방이 자신의 사랑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고, 상대가 정말 멋진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데 실패하기도 한다. 사랑 받는 것과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게 반드시 함께 가지는 않는다는 것, 우린 누구나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때 상처를 받는 건, 단순히 자신이 갈구하는 사랑을 얻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이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나라는 자각이 반드시 따라오기 때문이다. 상처를 입는 과정에서는--사랑 받는 것과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별개의 문제라는 인식 하에--그 자각이 정확한 판단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상처를 입는다는 건 어차피 이성적 사리분별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소모 문제니까... 상대방이 그 누구도 사랑할 줄 모르는 소시오패쓰였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사랑받지 못했을 때, 그 원인이--전적으로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는--자신에게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세상 사람 모두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세상 사람 모두에게서 사랑받는 사람은 단 한명도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한, 인류 역사상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녀 역시 세상 사람 모두를 좋아할 리 없다. 그렇지만 왠지 인간에 대한 애정이 넘칠 것 같은 그녀를 보노라면, 그녀가 세상에서 관심을 보일 수 없는 유일한 인간이 나였던가라는 착각에 빠진다. 내가 정말 그 정도로 특별한 인간일 리는 없다는 걸 알지만, 그걸 알아도 나의 "사랑 받을 자격"에 대한 의문이 생겨나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나의 사랑 받을 자격에 의구심을 품게 되기에--현실은 단 한 사람에게서 외면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에 빠진다.

한 평생을 살면서 세상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거, 세상 그 누구와도 등지지 않는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 겨우 30년을 살면서도 적은 만들만큼 만들어봤다. 애초에 그런--그 누구도 적으로 만들지 않겠다는--꿈은 꿔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내가 무관심했기에 상대도 무관심했고, 내가 미워했기에 상대도 미워했다. 그 모든 관계들은 상호적이었고, 따라서 정당했다.

내가 진심으로 공을 들인 인간관계가 외면당했다는 느낌이 던져주는 충격은 남달랐다. 나의 최선이니까 상대도 당연히 마음에 들어해야 한다는 발상이 얼마나 오만하고 발칙한지는 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라는 배타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녀가 내 최선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도, 내가 그녀를 좋아한만큼 그녀가 날 좋아하지 않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한 여자가 남자에게는 아니더라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진심을 알아보고 상대에게 인간적으로 보일 수 있는 호의, 그것만큼은 받길 바랬다. 그런데 그조차도 아니었던 걸까라는 의심이 왔을 때 많이 흔들렸다. 지독하게 흔들렸다. 어쩌면 심성 고운 그녀가 소위 "희망고문"이란 걸 하지 않기 위해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걸 내가 알 길은 이제 없다. (그럼 언젠 있었냐? 응?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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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상종

분류없음 2011/01/05 20:53
인간이란 동물이 잘 하는 거야 많지만, 지금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여기서 잘 한다는 건 "good at something"의 의미가 아니라 "cannot help but doing something"의 의미다. 암튼 그게 뭔고 하니, 다른 사람의 행위를 보고 그 행위의 의도를 읽는 거다. 일전에 마음이론(theory of mind) 이야기를 하면서 예를 들었다시피, 길 가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사람이 씨익 웃었다면 그 사람이 왜 웃었는지에 대해 온갖 추측--얼굴에 뭐가 묻었나? 내가 아니라 내 뒤에 날 따라오는 사람을 보고 웃은 건가? 날 아는 사람인데 내가 못 알아봤나? 등등--을 하게 된다. 마음이론이란 게 기본적으로 "타인도 나의 그것과 유사한 마음이 있다"는 데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런 다양한 경우의 수 중에서 보통은 '나라면 왜 웃었을까?'에 대한 답변에서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한다.

그런데 이게 타인에게 관용을 베푸는 데에는 독이다. 왜냐하면 관용이란 기본적으로 나와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건데, 이는 타인들이 자신과 유사하다는 인식에 기반해서 다른 사람의 행위를 평가하려는 인간의 본능과는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용은 기껏해야 '나라면 그러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은 그럴 수도 있겠지' 정도에 머물게 마련. 관용을 베푸는 게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배워도 그러려면 결국 stretch of imagination이 필요한데, 이는 역시 꽤나 피곤한 일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새로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를 알아내는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긴장관계가 발생한다. 내가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여기서 상대방의 행동이 내가 갖고 있는 기준에서 어긋난 경우가 발생하면, 우리는 두가지 선택의 기로에 선다. 하나는 '나라면 저런 짓은 안 할 텐데'라고 생각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못 박거나, '응? 왜 그랬지? 내 기준으론 좀 이상하긴 하다만...'이라고 생각하고 조금 더 지켜보거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타인에 대해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배우는데, 이는 후자를 택하라는 가르침이다. 사실 후자를 사람들이 강조해서 가르치는 이유는 전자가 훨씬 본능적으로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상대방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다보면 한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상대방을 어떻게 대할지 결정할 수가 없다.

무슨 말인고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이 자기를 좋아하길 바라기 때문에 남들이 좋아할만한 행동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상대방이 뭘 좋아하는지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예측하는 행위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상대방이 뭘 좋아하는지 예측한다는 것은 결국 "상대방은 이런 사람이다"라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때 가장 유용한 건 결국 마음이론이다. 이 판단을 내리는 데 폭넓은 관용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결국 인간이란 동물은 사람을 새로 만나서 사귈 때,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면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내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들을 하게 프로그램되어 있단 이야기. 결국 내가 좋아하는 일을 상대방도 좋아하면 친해지는 거고, 그렇지 않다면 서로 '저 사람 어딘가 좀 이상한데?'라며 멀어지는 거고... 끼리끼리 모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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